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그렇습니다. 그는 이제 영화감독이기까지 합니다)인 정성일씨의 발자취입니다.
마감에 쫓기면서 써온 정성일씨의 사랑고백이 가득 담긴 책이지요. 물론 그 고백의 대상은 '영화'입니다.
정성일씨의 사랑에 감명 받아서 일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옛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프랑스에 있던 시절. 그리고 월간 로드쇼에서 월급을 받던 짧은 기간이 무척 많이 떠올랐습니다. "나도 한 때는 영화광"이였는데라는 자괴.
부끄럽습니다.
아마도 이 책에 실린 글에 대해서 이런저런 평을 한다는 것은 주제 넘는 짓일 것입니다.
아니 아마도가 아니라 제가 뭐라 말할 수준이 아니다라는 점에서는 확정적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의 감상문은 제 고백으로 대체할까 합니다.
그러는 것이 이 책의 저자인 정성일씨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제게도 영화를 사랑하던 시절이 있었고, 예전처럼 열정적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영화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점을 일깨워 준 정성일씨에게 감사합니다.
제가 처음으로 영화에 대해 짧게라도 글을 쓴것은 1986년이라고 기억합니다.
경희대 대학주보에 올린 <서울예수(서울황제>라는 영화에 관한 소개글이였지요. 그리고 그 글은 부끄럽게도 영화를 보지 않고 쓴 글이였습니다. 조금쯤 변명을 하자면 당시 대학 신문사 문화부 예산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 돈으로 영화를 보고 온 사람은 선배들이였습니다. 문제는 영화를 보고 온 선배는 빵꾸난 지면을 채우기위해 영화평을 쓸 시간이 없어고, 저는 시간이 남아도는 1학년이라는 상황이였습니다. 부끄러운 변명을 계속하자면, 전 그 때 선배의 단편적인 감상과 영화 팜플렛을 보고 영화평 처럼 글을 썼습니다 (선우완 감독님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시작'을 계기로 영화를 편하게 소비하는 관객에서 뭐라도 써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것입니다.
사실 쥐뿔로 몰랐습니다.
그러나 매주 찾아오는 텅빈 지면(그래도 영화비는 주기 시작했습니다)을 뭐라도 채우기 위해서는 영화를 보며 이야기꺼리를 찾아야 했고, 닥치는대로 영화를 보았습니다.
리스트따위는 없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고 쓴글로 등록금(학보사 기자에게는 장학금이 나왔습니다)을 마련하던 시절에는 영화평론가라고는 고 정영일씨 뿐이였고, 기가 질리도록 박학함을 자랑하며 이 정도는 보아주어야 영화 좀 봤다고 할 수 있다고 시네필의 태도와 방향을 제시하는 정성일(^^)씨는 데뷔하기 전이였으니까요. ㅎㅎ
그래도 신기한 것이 누벨바그를 몰라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젠장)지겨워도 영화를 보다보니 어느새 쇼트를 구분하고 씬을 고민하고 카메라를 의식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에 실린 대부분의 영화들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정성일씨가 경애해 마지않는 오즈보다는 구로자와를 존경합니다. 와타나베 칸지의 장례식 이후에 보여주는 일상의 기계적인 반복.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탄식이 세상을 멈추어 보려고 그렇게 조용히 앉아 있어도 결국 시간은 그 주위의 모든 것을 바꾸고 있음을 슬프게도 인정하는 오즈의 영화보다 좋습니다.
저는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시나리오로 읽었지만 그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다큐가 주장을 담을 수 있음을 처음 알았습니다. 로베르 브레송을 꼭 봐야한가에는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자크 타티의 유머를 사랑합니다. 그는 재미난 외계인이였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성일씨가 장철의 무협영화에 바치는 피끓는 십대 소년의 막무가내 고백담을 할 때. 저는 <아들을 동반한 검객>을 떠올렸습니다. 찬바라 무비가 모두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귀축의 길을 걷는 자의 장절한 오버페이스가 어린 저의 심금을 울렸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고>를 청춘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기타노 다케시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를 가장 아름다운 청춘영화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2번 보는 것. 어떤 영화는 나이가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 알게해 준 영화는 허우 샤오시엔의 <비전성시>였으지만 자크 리베트의 3시간 57분짜리 <라 벨 누아죄즈 La Belle noiseuse>는 여전히 숙제입니다.
한 때는 버스트 키튼을 최고라고 생각 했지만 지금은 막스 브러더스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채플린의 코어는 '슬픔'이라는대에 격하게 동의합니다.
왕가위의 영화 중에서는 <화양연화>를 좋아하고, 중학교 때 온 식구들을 꼬셔서 <촉산>을 보러 갔다가 디지게 욕을 먹었지만 여전히 서극의 알파요 오메가는 <촉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가 '서유기'를 만들어 주겠지라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주성치-유진위의 서유기를 어쩔것이냐? 입니다)
저는 영화를 창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크린 너머에 완전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엿볼 수 있도록 틈새를 열어 보여주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라고 믿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느 시점을 어떻게, 어떤 순서로 열어 보이느냐는 온전히 감독의 능력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현재인 시제와 (제한된)관찰자 시점만을 가지고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러나 그만둡니다.
떠들 수 없다면, 들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어떤 영화를 보아도 재미없고, 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공유할 수 있는 사람. 토론이 가능한 사람. 무엇보다도 우정을 나눌 사람이 있어야 영화는 재미있어집니다.
그런 이유로 정성일씨의 책을 계기로 오래간만에 떠들어 봅니다.
비록 혼자말일지라도, 아니 혼잣말이겠지만.
이 넋두리가 정성일씨에게도 다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