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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 - 8점
송경아 외 지음, 박상준 엮음/창비(창작과비평사)

창비에서 2007년에 펴낸 창비청소년문학선집 5권입니다.
토종 SF소설 단편집이죠. 이걸 창비에서 냈다는게 "아~ 참 먼길을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 그 만큼 우리나라에서 과학소설이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 새삼 떠오르게 합니다. 아무튼 이제는 창비라는 곳에서도 과학소설집을 내는군요.

여전히 청소년문학 카테고리. 즉 과학소설은 애들이 보는 것이고, 또 잘 골라 읽히면 청소년들에게 유익한 교재가 될 수 있다는 편견은 존재하지만요. 창비의 과학소설에 대한 시선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말에 요약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청소년은 미래 세대다. ‘미래의 나’에 대한 청소년들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을 자극하여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미래를 향한 시대감각으로 확장시키는 것은 개인에게 바람직할 뿐 아니라 ‘청소년’이라는 세대의 특성상 모종의 당위성도 갖고 있다』

자신을 주류라고 믿는 책만드는 변방의 엔터테이너들은 이렇게라도 얘기하지 않으면 과학소설이라는 상업작품(본인들 생각에)을 청소년들에게 팔아 먹으려는 사업감각을 용서할 수 없나봅니다. "아멘~"

뭐 헛소리는 잠시 멈추고 책을 펼쳐보면
토종 SF 작가의 면면이 주르룩 흘러나옵니다.

먼저, 첫번째 작품은 김보영의 마지막 늑대입니다.
토종 SF단편선집에 빠지지 않는 작가입니다. <죽은자들에게 고한다>에 실린 '0과 1사이'가 무척 인상적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마지막 늑대>는 용들이 지배하는 지구에서 애완동물로 키워지는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마치 집안에 기르는 강아지와 인간처럼 서로 가시청역이 다른 동물들이 같이 살아가는 모습이 애잔합니다. 어쩌면 모든 동물들이 지성체이면 그들이 열등해보이는 것은 보는 방식, 듣는 방식, 표현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전제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두말이 필요없는 듀나의 가말록의 탈출은 한국 SF문학계에 보기드문 이야기꾼인 듀나의 솜씨가 잘 들어나는 작품입니다. 구형의 물체만 보면 본능적으로 소유하고 싶은 외계 생맹체 라두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보름달을 소유하고 싶은 라두-가말록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점에서 한국인과 닮았습니다.

박성환의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
표제작입니다. 주인공이 이 땅의 청소년이고, 또 이 땅에 청소년이자 수험생이라면 누구나 한번 꿈꿔왔을 '어느날 내가 갑자기 머리가 좋아지다면...'을 소재로 한데다가 그 꿈을 실현하는 기술이 알고보니 외계인의 침략이였다는 SF적인 요소까지 버무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제목까지 재미있으니 금상첨화겠지요.

2009년 <타워>로 장르팬을 넘어서 드디어 대중과도 만나기 시작한 배명훈의 엄마의 설명력은 그의 대중적인 성공이 우연이 아니였음을 엿볼 수 있는 단편입니다. 천동설과 지동설을 오가며 펼쳐지는 입양아(인도소녀)와 엄마의 사이의 구라는 거짓말이 중첩되면서도 그 사이에 숨은 진실의 터럭을 놓치지 않는 집중력과 흥미진진함이 발군입니다.
사실은 천동설이 맞다네요~ 믿거나 말거나 ㅎㅎ

송경아의 소용돌이는 형식상 SF보다는 판타지에 가깝습니다.왕따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유령 고모와 아버지에 얽힌 가족사가 더 궁금한 소설이였습니다.

이지문의 개인적인 동기는 인간의 감정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타인에게 재생할 수 있는 장치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SF의 전형성을 살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3인칭에서 1인칭으로 변화하는 끝마무리는 느닷없고 생뚱맞아서 아이디어가 아니라 작법을 더 연습해야 할 것 같은 단편입니다. 계속 창작을 한다면 말이죠.

이현의 로스웰 주의보는 옥탑방에 찾아온 외계인과 로스웰을 연결하고 그 외계인이 찾아온 이유가 빨리빨리병을 퍼트려 사회를 각박하게 만드는 푸라푸라를 물리치려 온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현은 탈출하지만 지구에 남겨진 푸라푸라는 지구인을 좀 더 신자유주의(이런 말은 나오지도 않지만)형 인간으로 탈바꿈 시킬 꺼랍니다.
현실을 외계인 탓으로 돌리고 혼자만 외계인을 따라 도망가버린 주인공에게 저주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정소연의 비거스렁이는 소외의 문제를 다차원공간과 시공연속체의 틈바구니로 풀어냅니다. 물리학용어를 감성적으로 설정하여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에서 상당한 내공이 느껴집니다.
문득 작안의 샤나의 토치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의 문제일뿐 주제의식도 상황논리도 다릅니다. 실존이라는 정체성을 담담하지만 굳건하게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정소연에게 한표를 던집니다.

우리말로 된 과학소설이 처음 선보인 것은 100여년 전인 1907년 재일 유학생들이 펴낸 학술지 '태극학보'에 쥘 베른의 해저 2만리가 <해저여행기담>이라는 제목으로 번안 연재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간 많은 일꾼들이 새로운 SF소설들을 소개하고 창작해 왔지만 SF소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에는 우리의현대사가 너무나 역동적이였다고 할까나요? 아무튼 장르소설이라는 것이 일회성 소개나 청소년용 읽을거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금 텍스트를 소비하는 새로운 세대들은 윗세대들 처럼 사라진 친척이나 대의에 충실하다 신세 망친 친구, 숨겨야 할 가족사, 대상 없는 부채의식 따위와는 일정정도 거리가 있는 최초의 세대입니다. 이런 세대가 있기에 장르소설의 미래도 밝아지지 않을까요? 순수한 판타지, 과학적인 사변이 쓸모없는 농짓거리이거나 역겨운 밥벌이가 아니라 정체성이 되어가는 세대의 성장을 보면서 장르소설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것이 저만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비록 월간 판타스틱은 넷상으로 숨어들었지만 "넷은 넓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