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잊혀진 것들에에 대해서는 기억도 있을 수 없을 텐데,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이라니요?
결국, 진짜 잊혀진 것이 아니라 잊은듯이 살고 있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대한 기억을 들쑤시는 책이라는 얘기이겠지요.
"잊을 수 없기에 잊은 듯이 살고 있는 사건과 사고, 관계와 상처를 쫌 돌아보자."
뭐 이런 뜻이 담긴 제목이라는 생각입니다.
책에 내용은 지은이인 김원교수가 1999년에 출간한 박사논문을 12년만에 개정 출간한 것입니다.
(실제 박사논문은 더 일찍 쓴 것인데, 1999년에 1차 출간하고, 이번이 2번째 출간입니다)
80년대 운동권의 (하위)문화에 대한 김원교수의 연구는 대의에 묻혀 지나가 버린 대학시절의 기억들을 근간으로한 현대 미시사의 거름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그 시대를 지나온 당사자이다 보니 소화하기에는 좀 힘든 이야기였고요.
지은이의 의견에 공감하거나, 동조하거나, 지지하거나를 떠나서 이런 종류의 기록에는 '기록한다'라는 행위자체의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상평이든, 비평이든, 비난이든을 할만한 건덕지는 없습니다.
다만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의 심층 인터뷰를 읽으며 남 몰래 눈물이 나서 힘들었다는 이야기와 약간의 고백이 이 책에 대한 감상으로 충분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전 꽤나 일찍 의식화라는 문턱을 경험했었던 것 같습니다.
고딩 2학년 때, 인하대를 다니던 동네형들(쌍둥이 형제였음) 덕분에 세상이 교과서데로는 아니라는 것과 광주를 알게 되었지요. 아무튼 일찍 접한 것이 화근이였는지 정작 대학 1학년때 만나 본 선배들의 수준이라는 것이 나와 별반 다른 것 같지도 않아서 속으로는 좀 잘난체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타 학교의 언더티에 속해 있던 친구를 빨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친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급정보와 문건들을 접할 수 있었기에 제대로 운동을 하지도 않으면서 운동에대한 이해는 높다고 자만하는, 결론적으로느 대가리만 비대한 웃기는 짜장이였던게 제 대학생활 당시의 자화상 아니였나 싶습니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80년대 대학생활이라는 것이 적어도 저에게는 혁명전야를 사는 기분이라 근거 없는 고양감과 흥분으로 매일을 보냈다는 것은 사실이로군요. 그러나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
그러나 책에서 제시한 91년 5월은 제게는 현실감 없는 얘기입니다.
전체적인 학생운동의 퇴조가 그 시점인지는 모르겠지만 91년도에는 한국에 있지도 않았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87년의 열기만을 기억하고 살았었죠. 책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기억은 하면서도 잊은듯이 살았다고 할까요?
그래요. 그랬던겁니다.
그래서 되돌아보니, 가장 벅찬 기억으로 이한열열사 장례가 생각나는 군요. 시청앞 광장에 모인 수많은 인파들과 열기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책 속의 인터뷰에서도 언급되었던 서울대 총학생회장의 맥빠지는 소리도 기억이 나는군요. 그 드높던 대중의 열기가 자칫 유혈충돌로 이어질까봐 걱정하던 발언들과 집회가 정리되던 순간들. 그 당시는 그게 일리있는 이야기 같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혁명의 열기를 제도화해버린 겁나는 순간들. 그땐 참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는데, 결국은 겁먹고 있었다라는 자기고백.........
그리고, 87년 대선일 전날, 시청앞 광장에 횃불처럼 타오르던 백기완 선생이 양김 단일화를 부탁하며 후보사퇴를 발표하던 굴욕적인 순간. 이어지는 선배들이 발언들. 현실적으로 김영삼이니, 그래도 우리 김선생님이 맞다느니하는 얼치기 제갈공명들의 천하지계.
그렇군요. 제 혁명은 그 때 끝난것이였습니다.
87년 대선의 결과이후 제 마음 속의 혁명은 끝난 것이였던 겁니다.
이제까지 모르고 있었지만....
그러고 보니 그 이후로는 별다른 운동의 기억이 없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단지 88년부터 연애사업에 매진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끝났기 때문에 연애사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이죠.
한때는 용이라고 생각했지만 도로이무기라고 깨달은 때는 1991년이 아니라 87년 겨울이였던겁니다.
그리고 이제는 한대련의 지도아래 단식과 삭발과 집회를 이어가는 대학생들을 걱정하는 뜨뜨미지근한 시민이 되어버린 자신을 별 고통없이 인증하는 사람이 되어버린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