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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 - 4점
레브 그로스먼 지음, 박산호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장르소설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었을 때.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의 하나가 '장르소설이란?' '작가 스스로 만든 조건들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소설'이라고 의견이 있습니다. SF라면 물리법칙에 충실하든 새로운 물리법칙을 설정하든 그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가 진행 될것이고, 판타지 소설이라면 저마다 다른 마법의 법칙들과 크리쳐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진행 되겠지요.
그러나 장르소설의 역사가 하루 이틀이 아닌이상 매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라고 작가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조금쯤은 무리한 요구이거나 심지어는 부당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 이유로 로봇 3원칙은 아시모프의 작품외에도 여러 작가들이 다양한 형태로 변주하거나 그대로 차용해 쓰는 것일테고, 드래곤은 언제나 마법의 하늘을 날아다는 것일 겁니다.

레브 그로스먼의 소설 <마법사들>도 선배 작가들의 위대한 유산 사이에 그 토대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밝히자면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와  조앤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요.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공부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현실세계의 따분함을 하루하루 억지로 견뎌가고 있는 주인공 쿠엔틴 콜드워터. 어릴 적 읽은 판타지 소설 '필로리 앤드 퍼더' 시리즈를 잊지 못하고 있는 쿠엔틴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완전한 이상향 '필로리'에 매료되어 현실 속 불만을 필로리에 대한 동경으로 풀어내려고 합니다.

그다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프린스턴대학 면접실로 간 쿠엔틴은 놀랍게도 그 자리에 죽어 있는 면접관을 발견하고, 사건현장에서 만난 여자구급대원이 건네주는 봉투를 홀리듯 가지고 나옵니다. 봉투를 펼친 순간 브레이크빌스 마법대학으로 인도된 쿠엔틴. 수백 명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독특한 마법대학 입학 시험을 치르게 된 쿠엔틴은 우수한 성적으로 시험에 합격하죠.

훌륭한 마법 교수진의 지도로 전도유망한 마법사 지망생이 된 쿠엔틴은 '필로리'가 환상의 세계가 아닌 실존하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고 친구들과 함께 필로리를 직접 찾아나서게 됩니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판타지소설을 몇권이라도 읽어본 독자에게는 참, 평범해 보이지요.
'필로리'는 '나니아'의 다른 이름이고, 브레이크빌스 마법대학은 호그와트를 대학으로 바꿔 놓았을 뿐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작가의 고뇌가 시작되지요.
이 뻔한 설정과 이야기를 어떻게 자신만의 이야기로 풀어 나갈 것인가가 승패의 관건이 됩니다.

결국 레브 그로스먼이 택한 길은 모든 클리쉐들을 피해보자라는 선택이였습니다.
주인공 쿠엔틴은 특별히 잘나지도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술꾼에 사건의 해결조차 제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조연같은 인물로 그려지고요. 해리포터 시리즈의 쿼디치에 해당하는 마법게임 웰터스는 하는둥 마는둥 학창시절에 잠깐 겪어 본 스포츠경기 중 하나 처럼 지나가 버립니다. 현실에서도 마법학교에서도 심지어는 필로리에서도 주인공 쿠엔틴은 만족스러운 삶을 찾지 못합니다. 아마도 주인공의 이런 태도를 현실의 반영이라고 생각한 듯 싶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뒤틀고 피하고 무시하려해도 판타지 장르소설의 클리쉐들을 하나도 바꿔 놓지 못했다는 겁니다.
주인공의 무릎이 하나 없어지는 커다란 이벤트를 주인공이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벌어진 일로 처리하고, 주인공 쿠엔틴이 정신을 차린 다음에야 자신의 무릎이 없어진 줄 깨닫게 만드는 스토리 진행상의 만용을 부려보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저 애처로울 뿐입니다.

마치 다가오는 똥차를 피하려다 뒤따라 온 다른 똥차에 치인 꼴이랄까요.

오히려 '나니아'의 변용인 '필로리'의 지배자 엠버(무려 엠버입니다)와 움버의 몰락과 워처우먼의 비밀. 그리고 마법 이벤트와 모험에 좀 더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클리쉐를 창조의 걸림돌이 아니라 창조를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면 제법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되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게다가 느닷없는 필로리 복귀로 마무리되는 결말과 속편을 집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그 아쉬움은 더 클 수 밖에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