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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도로 계획

imuky 2007. 12. 6. 12:31
원래 경성의 전통 도로망은 광화문에서 황토현 광장(광화문 사거리)의 길과 서대문 ~ 종로의 길이 만나는 T자형 도로를 중심으로 자연 주거지를 따라 형성된 미로 형태의 자잘한 길들이 뒤섞여 있었답니다.(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 p94)

이에 조선 총독부는 1912년 10월 시구 개정에 대한 훈령을 내고 11월에는 광화문-광화문 네거리, 남대문-남대문 정거장, 동대문-경희궁 등 시구 개수 예정 노선 31개소를 발표해 시내 31개 노선의 정비 확장 사업을 1929년까지 추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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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 총독부 터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세종로(사진:이종학님)


이러한 시구 개정 사업을 통해 경성에 생긴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교통체증을 이유로 남대문 성곽을 헐고 광화문-경성부청(지금의 시청) 사이의 태평로를 넓히고, 남대문 정거장(경성역)과 용산으로 연결되는 큰 도로와 이어붙여 경성의 도로를 대표하는 주축도로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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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 옆으로 태평통 대로와 세로로 이어진 황금정길(을지로)가 보인다(사진:이종학님)


이에 따라 경성은 본래의 T자형 도로 체계에서 당시 교외였던 용산으로 발을 늘어뜨리는 이상한 모양의 간선망을 달게 되었고, 경복궁 앞 총독부에서 광화문, 경성역을 거쳐 용산으로 직행하는 남북축 대로는 지금도 서울의 중심부 도로망의 핵심으로 구실하고 있습니다.
광화문을 기점으로한 T자형 도로 체계가 경성부를 중심으로한 방사형 모양을 갖추게 된거죠.

결국 정리하자면 현재 서울의 중심부의 남북을 가르는 광화문 사거리로 부터 시청, 남대문, 서울역, 용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일제 무단통치 시절에 전혀 조사, 연구나 심의 등이 없이 총독부의 독단에 의하여 거의 폭력적으로 이루어진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식민지화의 초기 신영토의 지배자로서 군림하고자 했던 일본 식민정치의 무단성과 독단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이를 통하여 신영토의 주인인 된 일본인들의 도시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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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경성 태평로(사진:이종학님)


임선생~
백보 양보해도 최소한 경성부(지금의 시청)부터 남대문에 이르는 길은 예전에 길이 있었다고 해서 길이 아니라네.. 지금의 길 꼬라지가 된 건 일제의 필요 때문이라는군. 알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