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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끝물인 영화의 상영관은 텅비어 있었습니다.
100석이 조금 넘어보이는 극장.
튀겨 놓은지 좀 됐는지 약간 눅눅해진 팝콘과 커다란 콜라를 들고 앉아 있다 보니 어린시절의 추억이라는 것도 지금 상황처럼 구차하게 느껴지더 군요. 하지만 단 1명의 손님을 위해 낭비되는 모든 것을 감수하고 펼쳐진 스피드 레이서의 세계는 생각 이상으로 화려하게 두근거렸습니다. 그냥 저 스크린 넘어에서 계속 살고 싶은 유혹이 느껴질 정도로요. 그럴 수 없다는 거야 알고는 있지만 유혹 정도는 느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입니다.
이미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나가 버려서 디테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기억의 덩어리 속에 담겨진 무엇인가만은 확실히 잡아냈더군요. 그래요. 그건 꿈이자 추억이였습니다. 적어도 나의 과거는 그런 가상현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가난도, 흙내음도, 송아지나 닭 같은 생명체들도 아니고, 시원한 나무그늘이나 평상 같은 건 애초에 존재 조차 하지 않았던 것 처럼. 나의 어린시절은 애니메이션과 만화, 프라모델과 덜컹거리는 버스 속에 존재하더군요. 묘한 긍정 상태.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세밀화로 남기시는 정태령씨의 작업실에서 발견한 철인28호 처럼 버츄얼은 더이상 흉도 아니고, 특이하지도 않으며 문제꺼리 조차 되지 못한다는 기분이였습니다.
하긴 손에 잡히는 실재를 추억하는 어른신들의 고향도 이제는 다 파괴되고 없으니 버츄얼이나 리얼이나 결과는 허상. 허상. 허상.
서양인의 골격을 동경하는 일본 아니메의 그림체는 진짜 서양인이 연기해도 위화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이 되고, 기본 멜로디만 같다면 미국놈이 일본어로 랩을 하던 말던 스피드레이서는 달려라 번개호가 돼서 트랙을 종횡무진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과거는 버츄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