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매력적인 제목 만큼 글의 진도도 빠르게 나가는 책입니다.
한가지 주의할 점은 정말로 가볍게 술술 읽다가는 나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도착자들이 저지른 자극적인 내용의 살인과 도착증세뿐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프랑스 번역체가 대게 그렇틋 문장의 앞뒤를 주의하지 않으면 도대체 뭘 꾸미고, 뭘 강조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수가 생깁니다.
개인적으로는 질 드 레에 대한 생각이 헷갈리기 시작했으며, 사드에대해 좀 다른 관점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글로 쓰인 똥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라는 문장.
좋찮아요 ㅋㅋ
다만 안타까운 것은 과거의 도착증이 신을 위한 타락과 자유의 의지, 창조적 원천이였다면 현재의 도착증은 사회적인 것으로써 만인의 도착증이라는 똥통이라는 점입니다.
감시하고, 부정하고, 외면한다고해서 없어질 악이라면 고생도 안할 텐데 말입니다.
저자와의 인터뷰 : 리베라시옹 Liberation / 2007.10.20
도착자들의 역사, 그 ‘저주받은 존재들’
이번 책의 목적은 선과 악에 대한 탐색이더군요. 그 질문 속에서 도착증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떤 겁니까?
도착증의 특징은 그것이 악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즐긴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부 범죄자들은 도착적이지 않습니다. 악을 즐기지 않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딱히 범죄자가 아니면서도 악을 즐기는 도착자들이 있습니다. 그 형상은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습니다.
질 드 레의 사례에 대해서 오랫동안 언급하시더군요.
질 드 레는 그 역전 가능성의 증거입니다. 대단히 복잡한 인물이죠. 그는 진정한 반항인이었던 잔 다르크에게 매료되어 선을 향해 이끌립니다. 그러나 잔 다르크가 국가의 이상을 구현했음에도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면서 그 영웅주의의 세계가 무너지자 질 드 레는 그때부터 악에 빠져듭니다. 그는 약 300명의 아이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살인마로 여겨지고 있죠. 그의 재판을 계기로 사람들은 처음으로 악의 근원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됩니다. 악의 세력을 추궁받은 질 드 레는 자신이 받았던 교육이 원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인류의 역사 위를 맴돌던 질문이 비로소 제기됩니다. 악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 질문은 요즘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악은 인간의 타고난 속성일까요?
우리가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속성이죠. 동물의 세계에는 악과 도착증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의 파괴충동을 선에 대한 이상으로 탈바꿈시켜서 최악의 짓거리들을 저지를 수 있죠. 동물은 결코 나치주의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잔인한 동물이라 해도 악을 즐기지는 않으니까요. 악을 즐기려면 악에 대한 의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동물계에 속해 있다고는 해도 동물은 아니죠. 난 우리를 동물과 혼동하는 것이야말로 도착증의 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사드는 별도의 경우죠.
사드는 좀 특별합니다. 하지만 그가 만일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얼마든지 범죄에 빠져들었으리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죠. 사드는 성도착증의 목록을 최초로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도착증에 대한 질문을 이론으로 정립시킨 사람입니다. 그는 법칙을 완전히 전복시킵니다. 계몽시대 인간이었던 그에게 있어서 선이란 지옥에 내동댕이쳐져야 마땅한 것이죠. 사드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 가지 정치체제 속에서 살았습니다. 구체제, 혁명기 그리고 제정시대 말입니다. 그는 늘 자신이 살던 시대와 괴리되어 있었습니다. 구체제에서 그는 매춘부들에게 저지른 가혹한 행위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성모독과 계간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죠. 그 두 가지 범죄는 혁명을 통해 폐지됩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신에게 맞서다가 로베스피에르가 다시 신권을 확립시키면서 제정시대 체제에서는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되죠. 하지만 사드가 미쳤던가요? 처음으로 사람들은 미치광이와 반미치광이를 구분하게 되죠. 사드와 함께 유럽 의학은 도착증을 점뽄하게 됩니다. 도착적 행동은 그때부터 악마의 화신으로서 악의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정신건강에 속하게 되죠.
중세에 신비주의자들은 악의 세력을 내세워 신에게 도전했습니다. 18세기에 자유사상가들은 기존의 도덕을 무시했고요.
신비주의자들은 완전히 도착적인 희생의식(채찍질, 오물 삼키기)을 치르며 전대미문의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신에게 자신들의 육체를 바쳤습니다. 반대로 자유사상가들은 쾌락의 도덕으로 질서에 맞섰습니다. 그들은 모든 형태의 자유를 요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의 자유를 포함해서 말이죠.
고대부터 도착증은 먼저 성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절대적인 도착증으로 평가되는 계간은 모든 세기를 관통하는 것이었고요.
계간은 번식을 가능케 하지 않기 때문이죠. 혁명은 계간죄는 폐지했을지언정 그것이 자연을 거스르는 행위라는 생각은 없애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계간은 여전히 일부 종교국가, 특히 이슬람 국가들에서는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는 범죄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일부 주에서도 그저 문서상일 뿐이긴 하지만 유죄로 인정됩니다.
1974년이 되어서야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고 선언되었습니다.
동성애자, 자위행위 하는 어린이 그리고 히스테릭한 여성은 1802년 정신의학이 탄생하면서 19세기 내내 최악의 도착행위로 여겨졌습니다. 성의학자들은 여러 가지 범주를 확립했습니다. 성적인 비정상행위들, 비정상인들, 물신숭배자, 시체애호자, 노출광, 동물성애자 등 한마디로 말해서 모두 성의 비정상상태죠. 신발과 함께 잠을 자거나 동물과 함께 또는 시체와 함께 잠을 잔다고 여겨지는.
동성애자가 어떤 문제를 제기하는 건 확실합니다. 한편으로는 고대부터 위대한 예술가들과 위대한 전사들이 동성애자들이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동성애에는 확연히 눈에 띄는 비정상 상태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최악의 도착자들이고 오로지 그들만이 스스로 도착증의 구조 자체를 구현한다고, 다시 말해서 치삔해야 하는 저주받은 존재들이라고 상상하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과학은 동성애자를 도착자들 속에 끼워 넣기로 했던 겁니다.
결국 번식에 대한 강박관념이 도착자를 정의하는 거군요.
사실 번식을 거부하는 것은 대단한 패덕이죠. 가뽄, 고대에 항문 성교는 도시국가를 위해 번식만 해준다면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졌어요. 홀로 섹스를 즐기며 살아가는 오늘날에는 혈통이 끊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있죠. 그런데도 서구 사회는 가족이 이제는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법률학적이라고 이해했어요. 사람들은 섹스가 갈구할 만한 것이라고 인정하죠. 따라서 인공적인 번식을 허용하고,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을 낳고, 그러면서도 번식에 대한 두려움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죠.
모든 경우에 비정상이 방해가 되는군요?
19세기에 위고와 발자크, 플로베르, 보들레르, 위스망스, 오스카 와일드는 기존질서의 우둔함에 맞서 도착증의 화려한 측면을 주장합니다. 1857년에는 『악의 꽃』과 『보바리 부인』에 대한 재판이 벌어집니다. 재판관들이 볼 때 엠마 보바리는 도착증의 화신이죠. 번식을 거부하고, 사회에 도전하고, 히스테리컬하고, 자살을 하니까요. 한편 보들레르는 레즈비언 여성들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아요.
그러고 나서 프로이트가 등장하죠?
프로이트의 천재성은 동성애자와 자위하는 어린이 그리고 히스테릭한 여성이 도착증자가 아니라고 말한다는 겁니다. 다형도착자인 어린이는 도덕이 혐오하는 숱한 일들을 저지르고, 특히 자위행위를 합니다. 문제는 자위행위가 병리학에 속할 경우에만 존재합니다. 프로이트는 디드로의 철학을 다시 내세웁니다. 선을 행하려면 악을 가르쳐야 한다는 거죠. 그에게 히스테릭한 여성들은 이제 도착자들이 아니라 신경증 환자들입니다. 그리고 동성애는 비록 많은 동성애자들이 도착자들이긴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도착증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죠.
오늘날, 사회는 두 부류를 심각한 도착자로 지정합니다. 테러리스트와 소아성애자 말입니다.
빈 라덴은 제가 볼 때 도착자의 절대적인 형상입니다. 그는 부랑국가를 구현하고, 여성을 증오하고, 동성애자에 대한 증오를 현실화하며 무엇보다도 과학을 왜곡합니다. 일본의 가미가제가 치른 희생은 도착증이 아니라 군대식 전통이었습니다. 오로지 군사적인 목표에 대항하는 자발적인 죽음이 포함된 일본 봉건제도의 전통이었죠. 자발적인 죽음에는 항상 어떤 계승이 동반됩니다. 하지만 이슬람 파시스트들은 목숨이 아무런 가치도 없고 희생에는 전혀 물려줄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파괴의 쾌락이죠. 빈 라덴은 “우리의 용맹한 전사들이 목숨을 바쳤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죠. “열대여섯 명이면 충분히 서양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그리고 소아성애자는요?
오늘날 소아성애자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입니다. 17세기에는 그렇지 않았죠. 그때는 성인과 아이 사이의 접촉이 특히 가정에서, 인정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용인은 되었어요. 어린이 강간 살해자는 언제나 가장 비열한 형상으로 여겨졌고요. 평범한 소아성애자들이 두려움을 일으킨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프로이트는 당대에 그에 대해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모든 신경증 환자들이 유년기에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들이라고 생각했던 반면에 곧 그 미심쩍은 생각을 포기하고 판타즘 개념을 만들어내죠. 오늘날 사람들은 우트로 사건(성폭행 당했다고 증언한 어린이들과 그 어머니의 증언만으로 무고한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사건)에서 그랬던 것처럼 환상과 실재를 혼동합니다.
현재 우리가 퇴행하는 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8세기부터 사람들은 인간은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했고, 정의는 명예회복을 향해 진보했습니다. 하지만 이십 년 전부터는 다시 어떤 인간들은 도저히 구제할 수 없다고, 그들은 절대적으로 저주받은 부분을 갖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사형제도는 폐지되었고, 우리는 현재 대단히 진보적인 시기에 살고 있지만 사람들은 다른 식으로 그것을 재도입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평생 감금시킴으로써 프랑스 혁명을 통해 폐지되었던 체형을 되살리고 있죠. 신체에 개입해서 정신현상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외과술과 내분비학의 진보는 소아성애자에게 발기를 멈추게 하는 약을 처방하기만 하면 된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준단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화학적인 구속으로는 욕망을 막지 못해요. 대개는 더 위험하게 만들죠. 지금 이 시대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에 화학 생물학적 해결책만 있으면 된다고 믿는 확신에 찬 도착적인 뭔가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근절시키겠다는 과학만능주의의 귀환인 거죠. 상품과 생체권력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조절이 되지 않는 자본주의의 인간인 신인간의 마지막 이론입니다.
1880년에 독일에서 상당히 멋진 이론으로 탄생했던 그 생체권력이 사십 년 후에 나치즘을 이끌었다고 입증하셨습니다.
인문과학과 사회학에 의존하여 신인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사실 관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생물학이 아니라 환경에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1918년에 독일 민족의 모욕과 함께 끔찍한 민중주의가 자리를 잡습니다. 당시 나치는 해결책으로 생물학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치주의의 특징은 과학의 도착적 활용과 처음부터 계획했던 대량학살입니다. 그것은 공산주의와 구분되는 점입니다. 공산주의의 경우 집단의 공포는 사실 출발점에는 없었던 이데올로기의 역효과니까요.
한나 아렌트가 만들어낸 ‘악의 평범성’ 개념에 대한 오해를 일소시키셨는데요.
한나 아렌트의 추론은 악의 쾌락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복잡하긴 하지만 정신분석학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악의 평범성’은 결국 누구든 나치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콘라트 로렌츠가 옹호했던 그 행태주의적 테제는 유지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돌아가는 형세를 알지 못하는 관료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 할 수는 있어도 아무나 대량학살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나치의 수장들 모두가 하나같이 공통점을 갖고 있어요. 그들은 의식적으로 과학을 내세워서 행동했다는 겁니다. 근본적이고도 완전한 법칙의 전복을 내세워서요. 나치의 살인마들은 헛소리를 하는 미치광이들도 아니었습니다. 정상적으로 추론하는 자들이었죠. 그들은 부정의 순간에도 도착증에 빠져 있었습니다. 현실을 호리는 미치광이, 사실을 부정하는 도착자죠.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가 회상록에서 자신이 가스실에 들어가 희생자들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그들이 고통받지 않았다고 감히 말한 것은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겁니다.
최종해결책을 자행한 독일은 문명의 한 모델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야만행위로 전향했죠.
그건 무엇이든 망상적인 위생학 속으로 곧장 이끌 수 있는 과학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는 다른 유형의 과학만능주의 확신을 되살렸어요. 현재의 집단적인 평가에 대한 편집증을 보세요. 아기들에게서 청소년범죄의 신호를 추적하겠다는 해괴한 생각처럼 말이에요. 영국에서는 벌써 태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쓸모없는 그 사이비 과학의 탐색은 사생활과 정신현상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침입입니다. 생체권력을 민주주의 사회들이 처한 새로운 재앙으로 지정해야 합니다.
정리|베아트리스 발라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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