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비터문>의 원작자입니다.
정치학 교수이며 문학상 수상자이자 경제학 에세이로 최우수 경제학도서상도 받은 사람입니다.
48년 생 엄친아로군요.
이 책에는 두개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아이를 먹는 식인귀
파리의 호화로운 아파트에서 시종이자 후견인인 카르치오피와 함께 살고 있는 발튀스 자민스키는 교양있는 젊은 법률가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폴란드 출신의 그는 아이들을 잡아먹는 식인귀였던 것이다.
그러나 채식주의자 카르치오피의 교육과 설득으로 마침내 스물다섯번째 생일에 앞으로는 결코 아이를 잡아먹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악습은 쉽사리 발튀스를 놓아주지 않는다.
어느 날 한 떼의 아이들을 보고 아이 고기를 먹고 싶다는 격심한 충동에 사로잡힌다. 고민 끝에 의사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결국 악습은 되살아나고 발튀스는 아이를 다시 잡아먹게 된다. 아들처럼 사랑하는 주인 발튀스의 타락에 괴로워하던 카르치오피는 온갖 방법이 효과가 없자 마지막 수단으로 발튀스를 결혼시키기로 한다.
아름다운 신부 후보감 중에서 발튀스는 마릴렌이라는 여자에게만 관심을 보인다. 그녀 역시 식인귀였던 것이다. 카르치오피는 서둘러 이 두 사람을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하고 '새 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이라는 비밀단체에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발튀스를 도우러 온 그 모임의 회원들 역시 발튀스의 꾐에 빠져 함께 아파트 관리인의 아기를 잡아먹기에 이른다.
마침내 카르치오피는 발튀스 에게 수면제를 먹여 그를 감금하고 만다. 그리고 버릴 수 없는 본능에 괴로워하던 발튀스는 끔찍한 결심을 하게 된다. 서커스단에 취직해 허드렛일을 하던 그는 크리스마스날 독특한 공연을 한다. 객석을 가득 채운 아이들 앞에서 그는 자신이 식인귀이며, 그동안 수많은 아이들을 잡아먹었다고 고백하고 속죄의 뜻으로 자신의 몸을 바치겠다는 선언과 함께 솥 안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모인 아이들은 잘 익은 발튀스를 부위별로 잘라 나누어 먹는다.
아이를 지우는 화학자
폴 폴콘은 아내도, 친구도, 아이도, 특별한 모험도 없는 생활을 이어가는 외롭고 불행한 남자로살충제 회사의 연구실에서 일한다. 그의 관심사는 벌레를 효과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과 틈날 때마다 새로운 색깔로 자신의 집을 칠하는 것뿐이다.
어느 날 새로운 색깔의 페인트를 만들던 그는 잠시 뜰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길잃은 개의 습격을 받고 페인트가 묻은 붓을 개에게 휘둘렀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개의 얼굴에서 페인트가 묻은 부분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6개월 후, 집 근처의 초등학교 아이들이 등하교길에 보여주는 명랑함과 행복한 모습에 화가 나 있던 폴은 마침내 자신의 특별한 페인트로 그 중 몇몇을 지워버리기로 결심한다. 그 아이들의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쓸모없고 늙어빠진 존재로 여겨져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치밀한 답사와 준비 끝에 가장 시끄럽고 활기찬 어린 소녀를 비롯해 아이 네 명의 얼굴을 지워버리는 데 성공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천사처럼 아름다운 한 소년을 눈여겨보게 된다. 그애에게 질투를 느낀 폴은 그애의 얼굴을 지워버리려고 시도하지만 뜻밖에도 이번에는 그 페인트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엉겁결에 그 소년을 유괴해 자신의 집 지하실에 감금하고 만다.
유괴 사건은 즉시 언론에 보도되고, 폴은 소년과의 기묘한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소년은 음식을 거부하고, 그 사실에 놀란 폴은 소년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소년이 원하는 음식과 옷, 장난감 등을 사나르면서 그의 생활은 서서히 변화하고,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지하실험실에서 유독 가스를 맡고 실신한 폴의 목숨을 구해준다. 이에 죄책감이 더욱 깊어진 폴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집을 떠난다. 이윽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는 자신의 집이 불길에 휩싸인 것을 보고 잠시 대혼란에 빠진다. 자신만 나서지 않는다면 자신의 범죄와 모든 것이 불 속에 묻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살려준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소년을 구하고 자신은 숨을 거둔다. 그가 유괴범임을 알아챈 군중들이 던지는 돌멩이가 떨어져내리는 폴의 얼굴에는 평생 처음으로 아름다운 미소가 떠오른다.
<아이를 먹는 식인귀>의 경우
소수자의 생활 역경 보고라기 보다는 부르조아지의 은유가 더 강렬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반전의 강렬함은 그 생각을 더욱 확신을 갖게 만듭니다.
<아이를 지우는 화학자>는 아이들이라는 대상을 통해 어긋난 방식으로 세상과 화해를 시도합니다.
그 과정이 결코 간단하지는 않치만 하기는 합니다.
결국 동화라는 얘기죠.
이 책의 저자 프로필을 보니 '재능'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더군요.
그 문제는 마츠모토 타이요의 <핑퐁>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 배가 아파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