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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여름 무렵이 되자 국무성은 우리들이 안고 있는 제 문제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우리들이 파견된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지,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북한은 영변에 있는 미국인과 북한인들 사이의 온갖 문제를 내가 해결하기로 되어 있다고 정해놓고 있었다. 95년의 수개월 사이 동안 나는 사실상 재북한 미국 연락사무소나 다름없이 되어버렸다. 그 동안 국무성 한국과는 정책문제 때문에 머리가 꽉 차 있었다. 상급직원들은 제네바 기본합의의 이행에 관한 운용상의 측면에 거의 흥미를 갖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것은 국무성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풍조였다. 미국의 외교관들은 외교정책을 운영하는 「제너럴리스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사안은 회피하려고 했다. 그렇게 되어 직무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출세의 가능성이 닫혀버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내가 사용후연료봉 팀에 관계하고 있던 12개월간 한국과장은 물론 과장대리나 북한담당자조차도 영변에서 우리들의 활동에 단 한 번도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들로부터는 아무런 지시도 내려오지 않았다. 문제가 일어났을 경우에는 북한에 있는 나와 팀 동료들이 알아서 그 문제를 해결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아마도 두 나라 사이의 공식외교문제로 비화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국가간의 공식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소위 외교의 최전선의 바깥에 몸을 담고 있으면 인간은 문제가 국제문제로 비화되기 전에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방법을 당장 습득하게 되는 법이다. 영변의 경우처럼 조선인민군을 상대로 하는 경우는 더했다.
1995년의 북한은 미국 외교관이 업무지원을 받을 보통의 외교관계 없이 일하는 것을 기대받는 세계에서 유일한 장소였다. 국무성은 어떠한 종류의 지시도 지원도 내려주지 않았다. 나는 국무성 한국과가 아니라 군비통제군축국(ACDA)과 에너지성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나는 북조선행 여비를 스스로 마련하고 항공권, 비자 수수료, 숙박비와 식비, 기타 대금을 자기 돈으로 냈다. 한 번 다녀올 때마다 수천 달러씩 들었다. 최종적으로 그 경비의 대부분을 정산해준 곳은 에너지성이었다. 국무성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런 특별수당도 받지 못했다. 임지의 생활환경 사정에 따라 보통 연봉의 20%이상에 달하는 격오지수당도, 임지의 현지언어를 쓸 줄 아는 데 따른 연간급여의 10%에 달하는 승급도 없었다. 만약 내가 평양의 연락사무소에 정식으로 임명되어있었다면 이들 수당을 받았을 터이다. 그렇기는커녕 동아시아태평양국의 직원들로부터는 나의 가족이나 북한에서 일하는 나 자신에게 감사의 말 한번 전한 적이 없다.

Quinones, C. Kenneth., Beyond Negotiation: Implementation of the Agreed Framework, 미출간
(山岡邦彦, 山口瑞彦 역, 『北朝鮮II: 核の秘密都市 寧邊を往く』, 中央公論新社, 2003, pp.65-66)

북한의 문제는 여기자 억류 같은 일을 벌이지 않으면 미국이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고, 억류된 여기자를 풀어 줘보이 김정일의 관대함이 부각되기 보다는 혐오감만 높아진다는 것이다.
비호감 전략의 근본적인 딜레마인데....
이래서야 악순화만 반복되는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 위 자료는 sonnet님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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