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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남성이라면 태권도복 입고 발차기 한번 안해본 사람 없을겁니다.
초등학교 때 안했으면 군대가서라도 꼭 배우고야 마는 태권도.
우리나라 금메달 효자 종목 태권도.
그 태권도의 기원은 무엇일까요?
궁금해서 찾아 봤습니다.
일단 2가지 단체의 2가지 기원이 있더군요.
먼저 ITF (국제 태권도 연맹,The International Taekwon-do Federation)입니다.
ITF에서는 태권도의 기원을 1955년 당시 제3군관구 사령관이였던 최홍희 장군이라합니다.
물론 최홍희씨가 태권도의 창시자인지 명칭만 지은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뉩니다마는 아무튼 초기 태권도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신 분인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럼 최홍희는 어떤 인물인가 하면 1918년 함경북도 명천군 출신으로 어려서 택견 고수 한일동에게 한국 전통무예인 택견을 전수 받았으며 일본주오대학 유학 시절 가라데를 익히고 해방 직후 현대 태권도의 모태가 되는 다섯도장 중에 하나인 청도관에서 수련하였답니다. 후일 오도관을 세우고 독자적인 무술을 만들고자, 한국 고유의 무술 택견식 격투기와 가라데의 시스템을 결합하여 발차기가 유연하며 체중 이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무도를 만들게 되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당수도·공수도 등 태권도를 지칭하는 명칭이 제각각이였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최홍희가 이끄는 당수 시범단이 하루는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시범을 보였답니다. 이를 본 이승만 대통령이 "태껸이구먼."이라고 한마디 하셨다죠. 이에 1954년 명칭제정위원회를 만들고 이승만 대통령의 “택견과 비슷하다”라는 발언을 따라 민속적인 "택견"의 어감을 포함하는 "태권도"를 채택했답니다. ㅎㅎ
하긴 어렸을 때에는 태권도장 보다는 당수도장, 합기도, 18기 같은 말들이 더 친숙했었던 기억이 나는 군요.
뭐, 이름이 기원이 이대통령의 한마디 때문이다라는 이야기는 믿거나 말거나 태권도라는 이름이 1955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후 최홍희는 1959년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하고 태권도 기술을 체계화하여 현대 태권도의 효시가 됩니다. 군인이었던 최홍희가 예편하고, 1961년 초대 말레이시아 대사로 근무하고 있던 시기에 대한태권도협회는‘대한태수도(跆手道)협회’로 개칭되었다가 1965년 귀국한 최홍희에 의해 다시 ‘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하고 1966년 대한태권도협회를 중심으로 국제태권도연맹(ITF)를 설립됩니다. 1971년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국기태권도라는 휘호를 받죠.
그러나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게 정치적인 이유로 최홍희씨가 1972년 캐나다로 망명하게 되면서 부터입니다.
(유신반대 운동을 했답니다)
ITF가 캐나다로 본거지를 옮기면서 1973년 대한태권도협회는 독자적으로 WTF(세계 태권도 연맹, The World Taekwondo Federation)라는 단체를 만들고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현재 올림픽종목을 주관하고 대한민국의 태권도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쪽은 바로 WTF입니다.
WTF쪽에서는 태권도의 기원을 우리 고유의 무술 택견과 수박도, 그리고 저 멀리 화랑도에서 찾습니다.
(멋진 기원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려니하는 기원이기도 합니다)
ITF쪽은 캐나다에 정착한 이후 전세계 태권도 보급에 힘씁니다. 이 중에는 사회주의 국가도 있었고, 특히 북한이 ITF의 회원국이라 꽤 오랜동안 ITF는 북한 태권도이며 이적단체로 분류되어 우리나라와는 담 쌓고 살았더랍니다.
(스포츠화한 WTF에 비해서 ITF는 초기 무술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최영의의 극진 가라데와 초기 태권도간의 명칭 통합 논의도 있었던 듯 합니다마는 최홍희, 최영의 두분다 박정희 정권과의 불화로 무산되었다는 야그도 있습니다. 확인된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서두 만약 통합되었다면 대야망의 최배달이 태권도를 쓰는 것이 설정 오류가 아니라 사실이 되었겠지요.
그럼, 여기까지만 놓고보면 현대의 태권도는 최홍희라는 걸출한 인물이 가라데를 기반으로 우리의 전통무예를 가미하여 만든 새로운 무예가 됩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다 일까요?
최홍희 한사람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초기 태권도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관여하고 있었더랍니다.
어디에 어떤 사람들이냐면...
바로 청도관, 지도관, 무덕관, 창무관(YMCA 권법부), 송무관. 이렇게 5도장 입니다.
가장 먼저 문을 연 청도관부터 살펴보죠.
청도관의 창설자는 이원국으로 1907년 충북 영동 태생. 이분도 어려서 택견을 수련하고 19세인 1926년 일본에 건너가 주오대학 법학과(최홍희의 학교 선배로군요)를 다니면서 가라데의 효시라 일컬어지는 후나고시 기친의 쇼토칸에서 5년간 수련하여 4단을 받았답니다.그 이후 가라데의 뿌리를 확인하기 위해 10여년간 오키나와를 현장 답사하고 중국 상하이와 허난에서 쿵푸를 수련했답니다. 1944년 9월 서울 서대문구 옥천동에 있는 영신학교 강당을 빌려 공수도를 가르친것을 시작으로 해방 이듬해인 1946년 2월 정식으로 청도관 간판을 내건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태권도 도장인 것입니다. 1947년 서울 YMCA에서 한국 최초의 연무대회를 개최했으며 그가 가르친 제자들은 이후 한국 태권도계의 주류가 됩니다. 한국전쟁 당시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도미했습니다(허걱!!!)
미국에서 태권도의 대부로 추앙 받는 이준구도 이분의 제자입니다. 2003년 97세의 나이로 타계했습니다.
다음은 최대 도장이였던 무덕관입니다.
무덕관을 세운이는 황기입니다. 어려서 택견을 배웠답니다 (어째 이글을 자꾸 쓰는 것 같습니다). 1935년 남만주 철도국에 입사해 중국무술도 배운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여부가 논란이되고 있답니다. 덧붙여 그는 직접적으로 가라데를 수련한 적은 없지만 철도 회사를 다니면서 도서관에서 오키나와 가라데 책을 읽고 가라데의 철학을 읽었다고 하더군요.
광복 직후 서울 용산역 부근의 철도국에 운수부 부설 당수도부를 세운 것이 출발점이랍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황기는 대한당수도협회를 만들어 한중 친선 국제 당수도 연무대회를 개최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였습니다. 1957년, 무덕관 관장 황기는 한국의 고전 무예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 한국의 전통 무술, '수박'을 발굴합니다. 이 무예서로부터 손과 발의 타격 테크닉을 취해서 무덕관 태권도의 기술을 완성시키는데요.한때 다른 도장들과의 통합을 추진하다가 실패하고 최홍희씨가 주도하는 태권도협회로의 통합에 반대하여 1960년대, 대한 수박도 협회를 창시하여 한국의 전통 무술로 정부로부터 공식 인증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자노선은 제자들의 반발을 불러서 황기는 무덕관에서 제명되기에 이르고(이런!), 이후 미국등 해외에 수박도를 전파하는 데 주력합니다.현재 수박도는 국내보다는 미국, 호주 등 해외에서 더욱 높은 지명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무덕관은 당시 최대의 태권도 도장이었는데, 1953년과 1970년 사이에, 전체 태권도 수련자의 약 75%가 무덕관에서 배웠달 정도였습니다. 무덕관은 현대 태권도 형성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곳이죠.
지도관은 일본 유학 시절 가라데를 배운 전상섭이 세운 도장입니다.
1943년 귀국한 그는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유도 학교 조선 연무관에서 유도와 가라데를 가르쳤습니다. 광복 후에는 1946년 3월 3일 '조선 연무관 공수도부'를 세워 후학을 기릅니다. 조선 연무관은 전상섭이 한국전쟁 때 납북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지도관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지도관은 다른 도장들에 비해 대련을 중시하여 1970년대까지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하더군요.
창무관(YMCA 권법부)는 경성 농업 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당수를 가르치던 윤병인이 해방 후 잠시 몸 담았던 조선연무관에서 나와 1946년 서울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YMCA)에 창설한 도장입니다. 어린 시절 만주에서 중국 무술을 익힌 그는 일본 유학 시절 가라데 5단을 따기도 했답니다. 만주에서 익힌 무술은 주안파로 알려져 있는데 팔극권을 수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윤병인은 한국전쟁 와중에 행방불명되어 전쟁이 끝난 후 YMCA권법부는 제자인 이남석, 김순배가 주축이 되어 창무관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두 마리 용을 상징물로 삼게 됩니다. 이종우씨의 증언에 따르면 창무관 관명은 한국전쟁 이전부터 윤병인이 애칭으로 사용했던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윤병인은 체구는 왜소해도 혈기왕성하고 우직한 무인이였으며 중국 무술과 가라데의 장점을 혼합한 독특한 무술을 제자들의 특성과 체격조건에 맞게 지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도장들과는 움직임이 조금 차별화 되어 직선적이고 딱딱한 다른 도장의 동작들에 비해 좀 더 부드럽고 최고단자 품새로 팔기권, 즉 팔극권의 투로를 연마시키기도 했답니다.
마지막으로 송무관입니다.
송무관의 창설자 노병직은 일본 유학 시절 쇼토칸에서 이원국과 함께 후나고시에게서 가라데를 배웠답니다. 광복 후 고향 개성으로 돌아 온 그는 활터에서 젊은이들에게 가라데를 가르친 것이 인연이되어 1944년 3월 20일 송무관을 창설하게 됩니다.
송무관의 송은 늘 푸른 소나무의 송과 고려시대 수도인 송도의 송, 그리고 가라데를 배운 쇼토칸의 쇼, 즉 송(松)이랍니다.
이상 보신것처럼 초기의 태권도에는 최홍희씨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노력을 하며 후학을 길러낸 바탕이 있습니다.
물론 가라데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요. 실제로 가라데를 배우고 가르치신 분들이시니까요. 그러나 태권도가 가라데의 다른 이름이라고 까지 하는 것은 좀 지나친 처사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창무관의 전신인 YMCA권법부는 권법이라고 칭할 만큼 중국무술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장이였고, 최고단자 품새에 팔극권 투로가 포함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당대 최대 도장이였던 무덕관에서도 최고단자 품새에 태극권이 있었다고 하니 "원래는 가라데인데 일본놈들꺼라 이름만 태권도로 바꾼 것이다."라는 말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일방적인 견해 같습니다.
오히려 해방 이후 여러 고수들이 전통무예를 살리고 중국과 일본의 무술을 받아들여 지금의 태권도가 되었다는 것이 맞는 말 같습니다. 비록 관에의해 주도 되고, 무예라기 보다는 폴짝거리는 스포츠화 되어 버렸지만 선배 무술인들의 노력을 폄하하거나 무시할 수 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남북한의 대치 상황이라는 악조건 때문에 현대 태권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최홍희씨의 제자가 한국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현실입니다. 물론 한때 ITF가 이적단체 취급을 받았고, 그로인해 최홍희씨와 연관있다는 것이 부담이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홍희 제자설 같은 것이 음해의 수단이 되고 한때나마 그에게서 배웠다는 사실이 부정하거나 숨겨야 하는 사실이 되어버린 것이 쪼금쯤은 슬픈 현대사로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굳이 저기 저 먼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태권도는 이미 훌륭한 무술입니다. 오래된 전통을 자랑삼지 않고, 정치상황에 휘둘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태권도의 위상을 세울 방법은 있다는 얘기입니다.
생계수단으로써 점점 장사속이 되어가는 방과 후 어린이 스포츠센터 같은 태권도장과 무리한 메달 따먹기, 이전투구 없이 오로지 심신단련에 힘쓰는 진정한 태권도인이 많이 있으리라 믿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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