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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이크라는거 기획하는 사람에게는 쉬운일이지만 연출하는 사람에게는 지옥문을 여는일인지도 모르지요.
과거의 흥행작을 장점들을 잘 살려 계승하면 과거의 팬뿐만 아니라 현재의 팬까지도 끌어 모을 수 있겠다는 계산은 기획자의 것이지만 연출하는 입장에서야 이왕이면 내 개성도 살려서 더 잘만들고 싶은게 인지상정일테니까요. 그러나 리메이크되는 작품이라는 것이 분명 과거에 꽤나 좋은평을 들었던 작품일 것이 뻔하고 보면 내 개성을 살려서 잘 만든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목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리메이크에 임하는 감독들은 일단 기존 작품의 어디를 꼬아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기술을 차용하여 더욱 스펙터클하게 만드는 것은 기본 일테고, 원작의 인관관계들을 좀 비틀어 보는 것은 기본적인 선택지일겁니다. 그리고, 천녀유혼 2011은 그 두가지를 충실하게 실현한 작품이지요.

24년의 세월을 넘어 온 CG기술은 좀 더 화려한 액션과 판타스틱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고요. 전작의 러브라인이 영채신과 섭소천. 두 사람의 것이였다면 거기에 연적하를 더해서 3각 관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어이쿠!!!

그런데 이게 왠일 입니까?

1987년의 천녀유혼의 액션은 지금에 비하면 SFX기술은 떨어지지만 어검술과 장법이라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주문은 반야바라밀 한가지이지만 다양한 변주를 통해 호쾌한 액션을 펼쳤지요. 그런데 2011의 연적하는 아이템은 늘었는데 그리 강해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신기한 아이템에 의존하다보니 특유의 어검술을 펼칠 기회도 별로 없고, 장법은 구경하기도 힘듭니다. 화살은 석궁이 되어버렸는데 본인의 내공보다는 이것도 하나의 아이템에게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주문은 밀교의 포박술인 구자인. 즉, 아홉자 진결로 바뀌었더군요.

결론은 특징 없는 무협액션이 되어버렸다. 입니다.

그럼 러브라인은 또 어떤가요.
1987년작 천녀유혼의 영채신은 물과 인연이 깊습니다. 어리버리 물에 일단 한번 빠지고서야 귀신과 사랑을 나누게 되었고요. 첫 키스도 물 속에서 이루어지지요. 이게 또 아주 유명한 씬인데.... 2011년에는 없습니다.
신작의 첫 키스는 요력이 떨어진 섭소천에게 양기를 보충해 주기 위해서 하는 키스가 첫 번째입니다. 뭐 나름 애절하다면 애절할 수도 있는 상황이기는 한데, 문제는 첫 키스를 하고 나니 이놈 영채신에게서도 욕정의 냄새가 나더라는 겁니다. 헐~
전작의 키스가 영채신을 다른 요괴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갑자기 이루어진 것에 비해 화면상의 당위성도 떨어지는 마당에 첫 키스 직후에 바로 응응응이라니, 세월이 참 많이 변했구나 싶기는 합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3각 관계가 되면서, 아무리 기억을 못한다고 해도 우리의 섭소천이 양다리 걸치는 웃기는 년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도대체 소천의 진심은 어디에 가있는지 모르겠어서 '로맨스 라인'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는게 정말 큰일입니다. 이왕 연적하+섭소천으로 가겠다고 했으면 사랑하면서도 맺어질 수 없는 연적하의 마음에 집중을 했으면 어떨까 싶기는 한데, 전작의 장국영의 그림자가 너무나도 컸는지 영채신을 포기 못함으로써 어정쩡한 애들 사랑놀음이 되어버리고 만겁니다.
한마디로 클라이막스가 집중되지 못하고, 연적하의 죽음에서 한번, 섭소천이 연채신과 헤어질 때 한번으로 분산 되고 만거죠.
이거 이거 정말 안타깝습니다. 흑흑

영화 한편이 여러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오래동안 남으면서 명작 소리를 듣게 되는데에는 여러가지 조건이 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러한 조건 중의 하나가 맥락을 지우고 봤을 때, 즉 세월이 지나서 그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시대적인 배경과 동떨어 졌을 때도 그 영화가 재미있다면 명작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 전작 천녀유혼 1987의 맥락을 좀 살펴 볼까요.
1987년은 홍콘 반환을 10년 앞둔 상황입니다. 이 시기에 나온 영화 천녀유혼과 영웅본색은 홍콩반환이라는 역사의 스케줄을 앞두고 번쩍번쩍 빛나던 홍콩영화의 서막을 알리는 영화였죠.
낙약사를 두 번째 방문하는 영채신이 부르던 노래도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어쩌구 저쩌구 하는 노래였고, 소천과 채신이 함께 그림위에 남기는 싯구도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시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하게 변해도 사랑을 영원한 가치로 믿어보고 싶다는 마음을 엿볼 수 있죠. 여기에 우마의 검무는 세상에 도(道)가 아무리 많아도 나는 내 길(道)를 가겠다는 선언이였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어떤가요. 현상범 사냥꾼들이 온 마을을 휘져어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수동적인 무리였고, 영채신이 요괴의 소굴인 난약사로 간다고 할때 궁금해 하면서도 말리지도, 그렇다고 진실을 알려주지도 않는 무심하고 소극적인 사람들이였습니다. 덧붙여서 관리들은 뇌물만 밝히고 보신에 투철하죠.

그럼 2011 천녀유혼은 어떤 변화가 있나요?
관리도 현상꾼 사냥꾼 같은 폭력배들도 없지만 마을 사람들이 병맛입니다.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군중들이 주체적으로 영채신을 난약사로 보내고, 더불어서 사형수들까지 함께 보내버리는 영악한 존재들입니다. 뭐 결국은 나무귀신의 저주도 좀 받지만 그거야 퇴마사들이 해결해 주실것이고, 결국 마을 사람들은 조금치도 변화 없이 또 그렇게 치사하게 살겠지요.
그럼 이게 2011년 천녀유혼의 시대적 맥락일까요?

글쎄요?

전작은 시대상황을 반영해도 감독의 메시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맥락과는 동떨어진 시대에 다시 보아도 그 메시지만은 살아서 감동을 줍니다. 진심과 사랑. "이게 최고여~" 앞에서 영채신에게 감정이입하고, 소천을 애모하며, 우마 같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겁니다. 그런데 신작은 어떤가요? 이게 최선이였을까요?

"쳇!" 입니다.

아참, 그리고 보니 섭소천의 탄금도 빠졌군요.
영어 제목은 1987년 작이 Chinese Ghost Story였는데 2011년작은 Chinese Fairy Tale이로군요.
참고로 진짜 진짜 원작인 1960년작 천녀유혼의 영어제목은 The Enchanting Shadow이였습니다.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