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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 4점
찰스 유 지음, 조호근 옮김/시공사

이 책은 소설입니다.
영화, 애니, 만화,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SF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에 대한 재기발랄한 지침서가 절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제목만 보고 전 그렇게 오해했습니다. ㅜㅜ).

오히려 이야기는 타임머신 수리 기술자라는 주인공이 자신의 찌질한 인생과 화해하는 과정입니다.

그는 건설이 중단되어서 물리법칙조차 인스톨이 끝나지 않은 31번 우주에서 '시간문법학'의 법칙에 따라, 서술의 시제 변환을 동력으로 무한한 평행우주를 떠다니는 상자곽 타임머신에서 10년 가까운 세월을 홀로 보냈으며(상자형 타임머신을 타고 다니는 것은 같지만 결코 '닥터'는 될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친구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인 개 '에드'와 타임머신의 컴퓨터 인격인 '태미', 그리고 자신이 프로그램인지 모르는 상관 '필'뿐입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타임머신의 발명자이지만 가족을 버리고, 스스로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어머니는 행복한 순간을 무한 반복하는 타임루프 속에서 생활하고 있지요.
더 이상 앞으로 나가가지 않는 메타픽션 속의 주인공은 불안한 장르의 세계를 배경으로 자신의 인생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책속의 주인공에 불과한 것입니다. 헐~

문제는 한국어에는 '현재진행형 시제'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번역본인 관계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설정자체부터 시제의 변용을 통해 작동하는 타임머신이 주된 배경이다 보니, 다양한 시제를 응용한 문장 덕분에 좋은 평가를 받았을 이 소설은 그런 이유로 한국어로는 답답한 사적소설이 되어버립니다.  

타임머신이라는 장치를 빼고 나면 행불자 아버지와 과거의 추억만을 곱씹으며 살던 어머니를 뒤로하고 방구석에 쳐박힌 10년 히키코모리가 어느날 가족을 버린 아버지를 이해하고, 어머니가 언제나 추억 속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며, 세상으로 나오면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소설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책 속의 이야기라고 깜짝 쇼를 해버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에 비교해서는 오히려 첨부터 현실이 아닌 책속의 이야기라고 까고 들어가는 이쪽이 더 치열해 보이기는 하는데, 그것도 그뿐입니다.

SF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기 보다는 그냥 현대인은 대부분 과거에 매여 살지만 그 기억의 루프를 끊고 일어서면 다른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주인공이다라는 안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책이라는 거죠.

제목을 보고 오해했던 것처럼 터프한 SF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는 생활지침서였으면 좀 더 재미있겠 읽었을 것 같은데 아쉽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번역을 통해 전달할 수 없는, 고유의 언어만이 가진 영역이 분명 존재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주목합니다.

영어는 영어로 읽고 싶지만 이 일천한 실력이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