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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솔루트 바디 - 8점
박민규.배명훈 외 지음/해토

크로스로드 SF컬렉션 2번째. <앱솔루트 바디>입니다.
2008년에 출간 된 책이지요.

이 책의 감상에 앞서 크로스로드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크로스로드는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에서 발간하는 웹진의 이름입니다.
링크는 http://crossroads.apctp.org/ 입니다.

2005년에 창간된 이래 지금까지 매월 SF를 게재하고 있으며 2007년에는 첫 번째 앤솔로지 <얼터너티브 드림>를 펴낸바 있지요.  본래 APCTP는 포항공대(POSTECH)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연구소입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물리학자들의 교류를 증진하기 위해 세워진 이곳은 한국 과학문화 발전을 위해서 여러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그 중 한가지가 과학과 현실의 상호 소통을 위해 발행되고 있는 웹진 <크로스로드>입니다.

출판계와 팬덤이 못다한 일을 이공계에서 하고 있는 셈이지요.
아무리 '꿩잡는게 매'라지만 출판계의 분발이 요구되는 상황입니다. 물론 부실한 경제적 기반을 고려해 볼 때. 너무나 어려운 요구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분발은 해보자고요.

그럼 책의 내용을 살펴 보겠습니다.
총 12편의 단편이 실려있군요.
그리고, 첫 번째 수록작은 기성문단에서도 이름이 높은 박민규의 <굿모닝, 존 웨인>입니다.
존 웨인 사망에 얽힌 오래된 음모설(그러니까 1952년 숱하게 핵실험이 자행되었던 미국의 애리조나 피닉스 외곽에서 1954년 존 웨인이 <정복자>라는 영화를 찍은 이후 존 웨인을 포함한 스탭 중 다수가 암으로 사망했으며 이는 미국 정부의 방사능이 인체에 미치는 데이터를 얻기위해 조장한 일이라는)과 대한민국의 노회한 독재자의 욕망을 적당히 버무리다가 식량문제로 뒤통수를 치는 쌉쌀한 단편입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박민규의 구라빨이 빛나는 단편입니다.

서진의 <우리 반에서 양호실까지의 거리>는 좀비물의 형태를 빌린 가상게임이야기입니다. 알수 없는 버그로 가상현실 게임 속에 갇힌 주인공의 이야기는 가상과 현실이 무뎌진 경계공간 안에서 급작스럽게 끝납니다. 약간의 로맨스가 양념으로 쳐져있는데 그다지 비중은 없습니다. 좀 더 가벼운 라노벨 스타일로 밀어 부쳤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 단편입니다.  

표제작이기도 한 임태운의 <앱솔루트 바디>는 어떤 사정이로 인해 인류가 신체등급에 따라 분류되고 통제받는 사회를 배경으로 미니웜홀을 만들 수 있게 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금고 속의 전자화폐라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과학적인 설정의 정밀함 보다는 새로운 신체를 얻게된 찌질이의 변화에 더 촛점이 맞춰져 있는 단편이다보니 너그럽게 넘어가도록 합시다.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죽은 자들에게 고하라>에서도 만날 수 있었던 작가 송경아의 <우리 사랑 이야기>는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쌍둥이 조이와 로이 중에서 조이의 이야기입니다. 타고난 신체 조건과 출생 배경 덕분에 애드돌(AD Doll)이라 불리우는 광고모델 조이가  칼리그노시아(실미증)의 미치(美癡)를 만나서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도망가지요.
공익광고 촬영현장의 무리수를 빼고는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류형석의 <어떤 미운 오리 새끼의 죽음> 역시 유전자조작이 대중화된 사회를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소은은 비표준형 유전형으로 박해 받는 소수자의 입장이지요. 그런데 이야기를 곰곰히 살펴보면 용모야 그렇다 치더라도 어학능력도 딸리고, 업무능력도 변변찮은데 순전히 친구들의 호의(본인은 악의라고 생각합니다만)로 주제에 안 어울리는 연구소에 다니는 여자가 그것이 위선이었을 정, 그나마 자신을 호의로 대하던 사람들을 차례로 죽이고 그 대가로 신분세탁을 해보려다가 천벌 받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어째 못난이는 성질도 더럽다는 것 같아 찝찝합니다.

은림의 <환상진화가>는 몇번이나 재생할 수 있는 세계. 즉 영생이 평범함이 되어버린 세계 '돔'을 배경으로 합니다. 여성은 임신기능이 저하되었고, 짝짓기는 새로운 유전풀을 얻기위해 정부 통제하에 진행되는 의무입니다. 기억은 마음대로 보존할 수도 지워버릴 수도 있지만 과학은 깊어지기는 해도 더 이상 새로워지지는 못하는 정체되어버린 이곳에서 주인공 '나'는 플랜이라고 불리우는 식인식물을 사냥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인류를 제치고 먹이사슬의 맨꼭대기를 차지할 지도 모르는 플랜에 대한 묘사는 환상적입니다. 아름답고 치명적인 여인의 모습을 한 식인식물이라니... 매혹적이죠.
물론 과학적이지는 않습니다. 지구 인구가 70억이라고 해도 만약 5만의 플랜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하루에 한번, 인간 한 사람씩 먹어댄다면 이렇다할 생산수단 없는 플랜은 14년만에 모든 인류를 먹어치울테니까요. 게다가 본문을 읽어보면 번식력도 짱인듯 싶은데, 성체로 자라는데 20년은 걸리는 인간만을 먹어서야 어떻게 종족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제목이 환상진화가(幻想進化歌)로군요. 나머지 설정들이 하도 그럴듯해서 착각했습니다. ^^a

박민규와 더불어 이 책을 통틀어 일반독자(SF팬을 제외한)가 알만한 2번째 작가. 배명훈의 <조개를 읽어요>는 조개도 평생 한마디 정도는 남기고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조개의 말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인데, 외계인과 첫사랑 얘기가 나오지만 결국은 조개도 말을 한다. 특히나 조개무덤은 죽은 조개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모여서 한소리하고 죽은 거다.라는 아이디어를 풀어가기 위한 보조장치에 불과합니다. 기발한 발상과 허무한 구라는 이때에도 배명훈의 특징이였나 봅니다.
그래도 '간지러'하나에 '나도' 840개의 조개무덤은 이유없이 흐믓한 이야기입니다.

박애진의 <집사>는 전통적이라면 전통적인 로봇물입니다. 로봇은 감정을 배워가는 듯한데, 인간과의 소통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인간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인간도 로봇도 '섬'이로군요. 

이준성의 <고래의 꿈>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빛고래를 쫓는 어부의 이야기입니다. 빛고래에 휘말려 이루어지는 단 한번의 시간여행과 이루지 못한 사랑이 담담하네요.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우주를 여행하는 사람은 떠난 것이 아니라 과거에 남겨진 사람이라는 아픔이 문득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물론 억지로 장편화하기 보다는 단편영화로 말입니다.

유서하의 <플라스틱 프린세스>는 고어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신체를 회손하고 인공물로 대체한다길래 사랑의 대상이 로봇인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더군요. 아내를 위해 몸을 기계로 바꾸는 이야기는 철완 아톰에도 있었지만 그 과정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다 보니 이게 또 끔찍합니다. 감정도 찜찜해지는 이야기로군요.

박성환작가는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도 좋았지만 <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에 실린 <관광지에서>가 인상이 깊은 작가입니다. 이번에는 <꿈의 입자>라고 모든 것을 수식으로 이해하고, 꿈꾸지 않는 세상에서 꿈을 꿀 수 있는 요상한 능력을 갖고 태어난 주인공 소년의 수난사(?)입니다. 현실에서 꾸어온 것들로 발현되는 현상이라며 '꿈'이라하고, 동사형은 '꾸다"라는 그럴듯한 설명이외에 기계장치 신에 버금가는 소녀의 등장으로 황급히 마무리한 어리뻥한 작품입니다.  
수식으로만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들의 사고묘사와 시간을 되돌리는 시퀸스에서 상황을 꺼꾸로 써버린 트릭은 훌룡합니다마는 아이디어를 숙성하는 모자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정희자의 <지구의 아이들에게>는 지구인이 등장하지 않는 지구이야기 입니다. 아니 인류가 등장하지 않는 지구인이야기라는게 맞겠군요. 지구가 멸망한 후에 은하연방의 메르윈족은 자신의 후손을 지구에남겨 놓고 떠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마치 다시 발견한 듯이 찾아와서 영유권을 주장하지요. 기자 신분의 화자가 만난 지구 임시정부 주석 양첸 케촉은 지구에서 나서 지구에서 자란 메르윈족으로 스스로를 지구인이라고 규정하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정치인입니다. 지구인이 인류가 아니라 외계인이라는 설정상의 깜짝쇼가 너무 일찍, 혹은 너무 쉽게 밝혀져서 아쉽기는 합니다마는 동남아인이든 흑인이든, 아니면 백인일지라도 태어난 자란곳이 고향이라는 생각을 엿볼 수 있어 유효한 소설입니다.





이상 12편의 소설들을 살펴보았는데요. 각 편마다 고유의 특징이 있고, 신선한 아이디어와 노력이 담긴 국산SF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APTCP에서 펴냈음에도 불구하고 하드한 SF설정에 약하고, 12편 모두 1인칭 시점으로 편하게 풀어간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현재는 크로스로드의 방침도 환상적이라도 전분야를 망라한 과학소설에서 물리학을 바탕으로 한 소설로 범위를 축소하고 있다니 과학적인 설정에 좀 더 치밀한 작품을 기대해 봅니다. 더불어 크로스로드에서는 물리학자와 과학저술가의 만남과 토론 같은 과학소설 창작활동 지원 워크숍 같은 것도 열고, 물리 대중 강연 등 물리학을 소재로 한 창작지원 활동을 위한 다양한 지원 방안 마련할 예정이라니 조바심 보다는 느긋함을 가지고 창작SF의 미래를 기다려 봄직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