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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혹하던 시절.

가위질 된 것이라도 좋으니 영화라는 것을 보고 싶던 때가 있었다. 물론 그때도 시내극장가에서는 언제난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에로틱한 방화들과 세련된 헐리우드산 외화들. 그리고 이소룡의 부제를 코미디로 채우던 홍콩산 무협물 같은 것들은 언제나 관객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몇번의 불신검문을 뚫고 찾아간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올 때쯤이면 어쩐지 햇빛이 낯뜨거웠고, 애써 까보인 민증이 아까울만큼 공허했다. 아무런 이야기도 생각나지 않는 영화들. 토론의 여지가 없는 영화들은 한창 잘난척에 맛들린 청춘에게는 갓잖아 보이기 일수였고, 보다 굉장한 영화들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지적 호기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거리를 배회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마디로 영화를 잘난척할 꺼리로 찾고 있었다는 얘기다.

게다가 그때는 국산영화 몇편을 제작하면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쿼터를 나누어 주던 시절이였다. 외화를 수입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영화이지 영화가 목적이 아니였던 국산영화는 뭘해도 에로에로한 분위기였고, 어렵게 얻은 외화수입권을 가지고 돈 못버는 영화를 수입할 멍청이는 충무로 없었다. 지금은 이해한다. 아무리 본전이 목적이라도 영화를 제작하는데는 도니가 들고, 그 돈을 회수할 방법은 외화 밖에 없었으니 나라도 그렇게 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에로에로한 영화를 만들어서 외화를 수입하고, 그 외화로 번 돈을 다시 에로에로한 영화에 투입해서 대박날만한 외화를 또 다시 수입해오는 돌고 도는 충무로 인생(이라고 들었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엄혹하던 시절.

그 때 프랑스문화원이라는 곳에서 예술영화를 상영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프랑스 문화원. 당국의 검열도 받지 않고, 소수를 위해, 소수를 위한, 소수의 영화를 상영하는 곳.
내게는 그렇게 들렸고, 언젠가는 내가 찾아가야 할 곳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마침내 경복궁 맞은 편 '살 르누아르 salle Renoir'(나는 아직도 화가 르누아르인지 영화감독 르누아르인지 헷갈린다)를 찾았다. 첫 인상은 좁구나. 
뭘 기대하고 있었는지 아무튼 첫 인상은 시설이 좋치 않다는 것과 골방이라는 느낌이였다.
'프랑스 문화원 세대'라고 자칭하는 사람들도 있다던데 그들의 기억 속에도 그곳은 골방일까?
<씨네21>도, 부산영화제도 없던 시절.
그렇게 그곳에서 남들이 볼 수 없는 영화들을 보았다는 것이 추억일까? 아니면 그곳이 골방이라서 추억일까?

둘 다일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먼저 자리한 어쩐지 그런 분위기에 익숙한 똑똑해 보이는 사람들과 호기심에 찾아 온 촌놈 몇이 앉아서 같이 영화를 보는 곳이였고, 그 영화라는 것들은 무지하게 지루하고 재미없으며 난해하고 불친절하며 자막이 영어인 영화였다.
그래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볼 수 없는 영화였고, 또 골방이였다.

이제와서 돌이켜봐면 무슨 영화들을 보았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영어 자막 탓이다).
그러나 기억나는 영화도 한편 있는데, 그 영화가 바로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란>이였다.
원색의 기모노와 푸른 초원.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첫 대면의 기억은 그것 뿐이다. 원색의 기모노와 푸른 초원.
그러나 그 영화는 '주말의 명화'와는 다른 영화였다.

그리고 또 하나 떠오르는 '프랑스문화원'관련 추억.
1989년 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제를 한적이 있다. 그 때 상영작 중에는 신작이였던 <장미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상영장소는 서울시민회관이였다. 문제는 영화표는 문화원에서 팔고 상영만 서울시민회관에서 하는 것이였는데, 아뿔싸! 시민회관으로 직행했었던 것이다(덩벙거리는 것은 버릇이 아니라 천성이라는 생각이다). 영화상영시간은 다가오고 사람들은 모두들 들어가버리고, 영화는 보고 싶은데 경복궁까지 다녀오면 틀림없이 시간이 모자른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연히 서있기만 했다.
판단이 빠른 사람들(같은 실수를 한 사람이 나만은 아니였다)은 모두 포기하고 돌아가버린 그 때! 영화 상영 직전!!!
문화원 직원분이 그냥 여기서 돈내고 들어가라고 했다. 불쌍해 보였나보다. 게다가 주위에 시선들도 다 사라졌을 때이고...^^
(끝까지 버티도록 힘쓴 나의 우유부단함에 축복을...) 

그렇게 프랑스문화원은 내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동숭 아트센터에서 매주 화요일 시네 프랑스라느 이름으로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지 아마...

다시 갈 날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