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명의 국내 SF작가의 단편모음집이지요.
정가 8,900원에 무지하게 두꺼운(무려 300쪽이 넘는) 광고지가 딸려 오지만, 기본적으로 요즘 책값에 비해서 싼가격임으로 불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용단을 내려 준 에스콰이어 편집부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긴 미국의 SF작품의 경우 성인잡지인 '플레이 보이'를 통해 발표된 작품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면 이런 기획이 다른 잡지들에도 널리 퍼졌으면 하는 바램이 큽니다.
멀티버스의 본래 뜻은 다중 우주론(多重宇宙論)입니다.
우주가 여러 가지 일어나는 일들과 조건에 의해 통상적으로 갈래가 나뉘어, 서로 다른 일이 일어나는 우주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인데요. 평행우주론(平行宇宙論)이라고도 합니다.
9명의 작가가 그린 9개의 세계를 담은 평행우주라는 책제목에서 편집부의 센스가 느껴집니다 (명백히 아부이지만 진심이 담겨있다면 믿어주실라나요? (ㅡ,.ㅡa)).
일단 작품을 실은 9명 작가의 면면을 살펴 보면, 김보영, 이수현, 정세랑, 박성환, 윤이형, 김창규, 정소연, 곽재식, 배명훈 작가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진화신화 김보영 작가의 <진화신화>의 세계는 사람의 형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우주입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사람이 자신의 삶의 모습으로 형상도 바뀐다고 보면 되겠더군요.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왕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쥐죽은 듯이 살다 그 삶의 모습데로 형상이 바뀌어 호수 바닥에 숨어사는 용의 모습이됩니다. 마치 삼국사기에 실린 오래된 이야기처럼 풀어 놓은 글에서 작가의 내공이 느껴지는 재미있는 글입니다. <진화신화>는 행복한 책읽기 '작가의 발견 시리즈' 4권 김보영의 중단편 <진화신화>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안개 속에서 어슐러 K. 르귄의 소설과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 삼부작등의 번역자로 알려진 이수현 작가의 <안개 속에서>는 우주여행 르포작가가 찾아간 안개행성의 작은 술집의 풍경입니다. 배경은 여러행성에 지성체가 살고, 그 행성들 마다 우주여행이 가능한 세계이지만, 마치 현재의 지구의 오지인냥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안개바다 속을 떠다니는 물고기처럼 신기한 세상을 엿보는 전형적인 구경꺼리 SF입니다.
같은 제목의 다른 작품을 발표한 적이 있다지만 <멀티버스>에 실린 글은 신작이랍니다.
모조지구혁명기
전형적인 매드사이언티스트인 디자이너가 만든 모조지구에 홍보책임자로 일하고 있는 주인공의 테마파크 점령기입니다.
미친 창조주와 크리쳐의 반란이라는 고전적인 이야기를 심각하지 않게, 그리고 유쾌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하긴 어렵고 심각하게 뒤틀어봤자. 그 길은 이미 선배들이 갈고 닦아서 반질반질한 대로이다 보니, 이렇게 가볍고 유쾌하게 다루는 것이 오히려 SF팬에게는 부담 없어 좋습니다. 만약 주제를 물고 늘어지는 평론가가 있다면 그 사람이 '바보'겠지요.
한가지 궁금한 것은 주인공의 파트너인 천사의 나머지 날개들이 나올 때는 어쩌려나?라는 점입니다.
이걸 또 전기톱으로 자를 수도 없고, 본래 아홉장이랬으니 하나 빼고 이제 겨우 짝수로 맞추었는데 그냥 참고 버티려나요. 무척 아플텐데...
얼음, 땡!
박성환 작가의 신작입니다.
<관광지에서>의 감동 만큼은 아닙니다. 1400년만에 냉동수면에서 깨어났던니 밀린 예비군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라는 설정은 재미있었는데, "어!" 하는 순간에 꿈이랍니다.
단편의 한계일까요? 순수한 군대식 고무링을 사기위해 동대문, 서대문의 마녀들을 찾아 은벽돌길(금이 아니라 무려 은벽돌길)로 떠난 다음에서 우주화물선 노르스름호 이어지는 사이가 너무 느닷없어서 (진짜) 아쉽습니다.
오보에가 있는 토요일
윤이형 작가의 신작 <오보에가 있는 토요일>은 어느날 자신이 오보에 같은 소리로 대화를 하는 우주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작은 입자로 분해되어 지구에 도착했다는 설정. 그리고 여러 세월을 걸쳐 기억을 찾았다는 설정이 윤회의 다른 표현으로 보이며, 우주인으로써의 기억과 변형된 관계의 기억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은 만화<나의 지구를 지켜줘>를 연상시킵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애잔한 구석이 있어서 좋아합니다.
카일라사
김창규 작가의 신작 <카일라사>는 지구라는 휴양지에서 (지구인들은 모르게)휴식을 하고있던 전설적인 우주전사가 기억을 되찾고, 다시 우주라는 전쟁터로 나갈 것인지 더 휴식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는 상황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김창규 작가의 전작 <세라페리온>도 그렇고 <백중>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방대한 설정이 있지만 이야기는 그 일부라는 모양새입니다.
어쩐지 대작을 노리는 작가의 숨은 의도가 걸림돌(?)이라는 느낌입니다.
앨리스와의 티타임 정소연 작가는 하드한 SF설정을 감성적으로 풀어내는 재주가 있는 작가입니다.
<앨리스와의 티타임> 역시 다중우주라는 설정을 바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행동의 선의와 거스를 수 없는 운명, 그리고 작가가 존경할 것 같은 또 다른 작가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장르라는 무게에 눌리지 않는 작가의 뚝심이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만드는 수작입니다.
본 작품은 <HAPPY SF>2호(행복한 책일기,2006)에도 실려 있습니다.
읽다가 그만두면 큰일나는 글 '게렉터 블로그' 라는 게인 블로그를 통해 영화 리뷰와 함께 방대한 양의 야사, 설화, 기담 등을 각색하여 소개하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는 곽재식 작가의 신작입니다.
주인공이 3년만에 만난 그녀에게 풀어 놓는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컴퓨터 속의 시뮬레이션이고, 컴퓨터 밖의 세상은 또 다른 컴퓨터 속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초끈이론이 설파하는 다중우주를 컴퓨터 속으로 끌고 들어와서 시뮬레이션 속의 시뮬레이션이라고 풀어 놓았는데요. 결론은 세상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는 서로 돌고 돌아서 끊임없는 순환계 속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베르베르의 <신>과 같은 결론이지만 베르베르가 기계장치의 신에게 의존 했다면 이쪽은 훨씬 정치한 설정 속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발자국 한국 SF계의 스타(?) 배명훈의 신작 <발자국>은 보이지 않는 폭력. 특히 권력자의 폭력을 그린 우화입니다.
모두 다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상황을 드러내는 효과를 의도한 듯 보입니다마는 왠지 아쉬운. 좀 더 속시원하게 파헤쳐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느끼는 그런 단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