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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 1,2(합본) - 8점
/민음사

 

오즈의 서쪽에 살고 있는 사악한 마녀의 이야기 <위키드>는 이상한 책입니다.

독립적이고, 똑똑하지만 외모는 꼴불견인 여자의 인생 실패담이 이토록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니?!!

 

아시다시피 <위키드>는 라이먼 프랭크 바움의 1900년에 발표한 <오즈의 위대한 마법사>의 스핀오프 작품입니다.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1939년 주디 갈랜드 주연의 헐리우드 영화로 기억하지만 <오즈의 위대한 마법사>는 자신의 꿈을 드러내고, 믿으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힘을 이미 스스로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진짜 미국적인 첫 번째 동화'라고 일컬어지는 작품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저 멀리 무지개 넘어가 아니라 이미 내게 있다! 그것을 깨닫고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

이 얼마나 간편하고 교훈적이며 생명력있는 주장입니까? 굳이 신지학스럽다고 어렵게 이름 붙이지 않더라도 <시크릿>이라는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모습을 보면 <오즈의 위대한 마법사>가 110년 넘게 고전으로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읽힐 수 있는 힘은 바로 이러한 주장에 깃들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고전은 명성을 걷어내고 보면 애절한 사랑이야기거나 불굴의 의지, 혹은 보편적인 치정, 희망의 근거는 자신이라는 알만한 이야기들의 '선빵'들입니다. 마케팅의 선도자의 법칙이 이쪽 분야에서도 유용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왕 유용한 마케팅 법칙이다보니 선도자들이 언제나 1위일 수 는 없다는점 역시 명확합니다.

선빵으로 1위를 했어도 항상 리뉴얼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오즈의 위대한 마법사>의 리뉴얼은 언제 이루어졌을까요?

일단 대규모 공사의 첫 번째는 1939년 비주얼을 입힌 것이겠죠. 이 영화의 개봉 당시에는 흑백영화에서 컬러영화로 전환되는 시기이라 오즈의 다채로운 색상과 화려한 세트가 상당한 시각적인 충격이였을 것이라고 짐작되고요. 여기에 경쾌하고 아름다운 노래까지 더해져서 이후 '오즈'의 이미지를 결정하는데 가장 지대한 공을 세웁니다. 내용적으로도 원작소설에서는 오즈가 실존하는 국가처럼 묘사되지만 영화에서는 꿈으로 처리하고, 허수아비를 비롯한 3명의 친구들을 도로시의 주변 인물들을 꿈 속에 대입한 것으로 암시하여 오즈는 판타지라는 분위기를 더욱 강조했고요. 마법사 오즈와 함께 기구를 타고 캔자스에 돌아오려다 강아지 토토로 인해 기구를 탑승하지 못한 도로시에게 상당한 후일담이 부여된 소설과 달리 영화는 전반적으로 서사를 단순화하고 척박하고 풍요롭지 못해도 집만한 곳이 없다는 허술한 낙천주의를 강조하여 어린이용 동화로 롱런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두 번째 리뉴얼은 1964년 헨리 리틀 필드라는 교사의 손에서 이루어졌는데요.

이분은 <오즈의 위대한 마법사>를 19세기 말 금융독점에 반대하는 풍자소설로 읽어내서 <오즈의 위대한 마법사>의 의미를 확장했지요. 이 주장은 지금 확인해도 꽤 그럴싸 한데요. 요약하자면 절대 웃는 법이 없었던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1890년대 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캔사스의 농민들이고, 이 불황은 도로시가 부모가 아니라 친척이 사는 시골에 맡겨진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이 주장에서 오즈는 미국의 꿈이 되고요. 도로시의 집에 깔려 죽은 동부의 나쁜 마녀는 월스트리트의 은행가들이며 그 마녀가 여러해 동안 종으로 부리던 난쟁이들은 농민과 공장 노동자들이랍니다.

라이먼 프랭크 바움이 <오즈>를 쓰던 시절은 통화량 조절 실패로 인한 금융경색으로 미국이 경제적인 위기에 빠져있던 시기로 노란벽돌길은 금본위제라는 기존 금융시스템을 도로시의 요술 은구두(나중에 영화에서는 루비구두로 바뀌지요)는 화폐위기에 대한 인민당의 은화 해법. 지혜가 없는 허수아비는 농민. 심장이 없는 양철인간은 노동자. 용기가 없는 사자는 당대의 정치가 브라이언 혹은 국민이라는 주장입니다. 서부의 나쁜마녀가 매킨리 해너와 록펠러이고, 그녀의 피부색이 녹색인 것은 아마도 달러가 녹색이기 때문일 것이며 마녀의 부하들인 노란 윙키와 날개원숭이들이 유니언 퍼시픽철도에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와 아메리카 원주민, 매킨리에 의해 독립을 거부 당한 필리핀인을 상징한다는 주장에서는 이야기가 너무 딱딱 들어 맞아서 없던 흥미도 진진하게 생길 지경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리뉴얼이 <위키드>이지요.

희망 없는 판타지가 판타지 일까요? 거창한 정치적 명분도 알고보면 지인의 죽음과 복수라는 개인적인 이유일 뿐이고, 신성한 결혼은 배우자의 부정으로 얼룩져 있으며, 신앙은 무력한게 아니라 무능한 세상. 이게 21C판 '오즈'의 세상입니다.

주인공 엘파마는 스스로를 마녀라고 믿지 않지만 세상이 그녀를 마녀로 알고 있으니 마녀를 자처합니다. 이 깡마르고 초록색인데다 자식에게 매정한 미혼모는 정치적인 목적도 개인적인 복수도 행복한 가정도 이루지 못하고 다시말해서 자기 자신안에 감춰진 힘을 무엇하나 깨닫지 못하고 이루지도 못하고 사랑스럽지만 무지한 소녀 도로시의 손에 죽습니다. 그것도 대문자 A를 손에 들고 흔드는 라캉이 끼어들새도 없이 명확하게 마녀라는 이름으로 말이지요.

이중으로 뒤틀려 놓았다고 할까요?

뭐 그래도 현실적이기는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호명으로 내가 되고, 못난이는 예쁜이를 당할 수 없으며, 지식은 총구를 이겨냈지만 무지 앞에서는 무력하니까요. 쩝~

 

문득 "난 <닥터 지바고>가 왜 명작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라는 지인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아마도 러시아혁명을 걷어내고 보니 주말드라마급의 사랑이야기 밖에는 남지 않은 앙상한 <닥터 지바고>가 안타까웠겠지요.

뭐든 덧칠해주고 재해석해주지 않는다면 고전 명작따위 그저그런 옛글에 불과하다는 교훈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오즈의 위대한 마법사>는 행운이로군요.

 

그런데 아무리 요즘 헐리우드에서 프리퀄이 유행이라지만 오즈의 마법사까지 건드릴 줄은 몰랐습니다요.

다행히 감독이 샘 레이미랍니다.

쪼오금 기대해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