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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 옮김/자음과모음(이룸) |
슬라보예 지젝.
어느새 익숙한 이름이되어버린 철학자입니다.
그러나 익숙하다고해서 쉬운 것은 아니지요.
9.11사건 이후 쓴 지젝의 글을 모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쉽지 않습니다.
일단 9.11이후 미국의 변호와 코소보사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 등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상당히 필요하고요. 그외에도 여러 철학자의 주장들을 당연한 듯이 알고 있어야합니다. 게다가 번역체의 난관도 극복해야 하지요.
다시 말해서 페이지마다 지뢰요, 함정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지는 것은 있습니다. 100% 이해를 포기하더라도 아는만큼, 보이는 만큼 전해지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9.11에 대하여 지젝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스스로를 이런 종류의 폭력으로부터 배제된 섬처럼 인식해왔던, TV화면을 통해 안전하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만 이런 폭력을 목격해왔던 미국이, 이제 직접적으로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이제 '실재'의 세계에 도달하였음을 인정 해야만 하며, 이미 많이 늦었지만 '이런 일은 여기서는 일어나면 안돼!'라는 태도에서 '이런일은 어디에서도 안돼!'라는 태도로 이행하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타자성에 대한 존중'이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 공리라는 생각에 의문을 품습니다.
다중과 다양성에 대한 강조가 감추고 있는 것은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삶의 단조로움이며, 우파 포퓰리즘과 자유주의적 관용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위험을 무릅쓰는 적극적인 태도인 의지주의와 숙명론을 결합한 행동. 레닌이 자주 인용한 나폴레옹의 말 "일단 공격하고 나서 보자" 라는 자세인 것입니다. 모든 결과를 알지 못하더라도 일단 급진적인 행동을 실행에 옮기고, 일이 잘 될거라고 희망하는 태도야 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라는 것이죠.
이 밖에 재미있는 주제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 '내면으로의 여행'이라는 논리를 끝까지 따라가면 우리는 주체성의 텅 비어 있음과 대면하게 되고,
그리하여 주체는 완전한 탈주체 화를 떠 맡게 된다. 이 급진적인 버전의 선이 지닌 역설적인 결론은 종교에는 내면적인 실체가
없으므로 신앙의 진수는 순수한 예법, 즉 의식 그 자체에 대한 복종이라는 것 이며 '자아 속으로의 여행'의 궁극적인 희생자는
자아 자체라는 것이다.
㉡ 9.11 이후의 새로운 세상에서는 고문과 같은 논의의 가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옛날식 기술이 생존을 위해 필요할지도 모르며
극단적인 긴급상황(테러리스트 포로가 수백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정보를 쥐고있으며 시간도 얼마 없을 때)의 경우에는 신체적,
정신적 고문을 합법화 할 수 있다는 생각. 더 나아가서 '우리는 어쨌거나 고문을 하고 있으니, 차라리 합법화해서 과도한 고문을
막는게 낫다!'는 논리에 그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고문이 '합리적인'수준으로 유지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가장 잘못된 자유주의적 착각이며 대부분의 경우 고문은
'시계가 재깍거리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을 정신적으로 무너뜨리거나 처벌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겁을 주어
복종시키기 위해서 등 완전히 다른 이유에서 행해진다.
또한 어떤 특정한 상황. 다시 말해서 그가 입을 열면 수천명을 구할 수 있는 뭔가를 아는 죄수를 고문할 때에도 우리는 이 필사적인
선택을 보편적인 원칙으로 승격시키지 말아야 한다. 오직 그런 승격을 금하는 태도 속에서만 , 우리는 죄책감과 우리가 한 일이 용납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자각을 잊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아랍의 반유대주의를 팔레스타인인들이 처한 슬픈 곤경에 대한 '자연스러운'반응이라고 '이해'하거나, 이스라엘의 조치를
홀로코스트의 기억이라는 배경에서 나온 '자연스러운'반응이라고 '이해'하려는 유혹에 무조건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핵심은 개개인의 행위를 '종합하여' 해석하거나 판단하는 것, '더 넓은 문맥'속에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그 역사적인
배경에서 절단해내는 것이다.
㉣ 이슬람과 근대화를 양립시킬 수 있는 선택지가 이슬람-파시즘적 근본주의와 이슬람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양자택일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시도된 바 있는 세번째 선택지가 있다. 바로 이슬람 사회주의이다.
이슬람이 모든 위대한 종교 중에서도 근대화에 가장 심하게 반대하는 종교라는 사실을 한탄하기 보다는 이런 반대를 기회로
이해해야 한다. 근대화의 반대가 필연적으로 '이슬람-파시즘'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회주의 기획으로도 표명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초창기 무슬림 공동체의 의의와 역사를 다룬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다시 참조해 봐야 할듯)
개별적인 사건을 종합하여 해석하고, 더 넓은 문맥 속에서 판단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교훈은 무섭습니다.
이토록 의심이 많아서야 어떻게 '일단 공격하고 보자'라는 태도를 견지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고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겠지요.
깨어 있는 지성이라는 거 '쉽지는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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