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제저벨 - 8점
이영수(듀나) 지음/자음과모음(이룸)

 

 

듀나의 신간 <제저벨>은 픽스업 소설입니다.

픽스업 소설이란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단편들이 유기적으로 묶여 장편의 모양새를 갖춘 소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반 보그트의 <비글호의 모험>이나 레이 브래드베리의 <화성 연대기>같은 책들이 유명하지요.

 

아무튼 듀나의 <제저빌>은 작가가 창조한 링커우주가 배경입니다.

링커우주란 듀나의 다른 단편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 실린 표제작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 소개되었던 개념입니다.

링커 바이러스로 통칭되는 일군의 우주 바이러스들이 자신과 숙주의 유전자를 조작함으로써 자신과 숙주와 새로운 환경을 유기적으로 통합하여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한 세계입니다.

쪼오금 풀어보자면 링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그곳이 어느 우주의 환경이든 그 환경에 적응할만한 생명체로 폭발적으로 진화한다는 설정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설정은 이런 링커 바이러스를 우주로 퍼트리는 운반체들에 대한 설정입니다. 우선 비행종과 지상종으로 나뉘는데요. 모두 영화배우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 지상종

건설 담당 - 기네스

건물형 구조물 타입 - 올리비에

군인 타입(공격형) - 웨인

군인 타입(방어형) - 쿠퍼

 

* 비행종

거대한 우주선 타입 - 가르보

셔틀선 - 아자니

정찰선 - 드뇌브(카르트에 브로치처럼 생긴 작은 비행체랍니다)

궤도 정거장 - 디트리히

 

위와 같은 이름의 링커기계들은 전 우주를 돌며 식민지를 건설하고 링커 바이러스를 퍼트려서 식민 행성의 진화를 촉진시킵니다.

그리고, 초광속 우주여행의 기술을 갖고 있지 않던 지구인들도 이 링커 기계에 슬쩍 무임승차하여 우주 곳곳으로 퍼져나가 그 행성의 환경에 맞춰 제멋대로 진화해 버린 세계. 이것이 링커우주의 기본적인 얼개입니다.

 

 

그럼 '제저벨'은 뭐냐?

링커 네트워크의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매달린 행성 크루소 알파b를 배경으로 프리랜서 해결사(?) 노릇을 하고 있는 배의 이름입니다.

이 배의 선장은 링커 바이러스의 짖궂은 장난으로 곰돌이 인형 모양으로 진화한 사람이고요. 항해사는 고양이 얼굴, 선의는 회색빛의 프레드 애스테어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짐작하셨죠?

그렇습니다. 소설 <제저벨>은 '제저벨'이라는 배에 선원들이 겪는 이런저런 모험담을 뼈대로 듀나의 취향이 1200% 반영된 취향 대폭발의 이야기 모음집입니다.

우선 제저벨이라는 이름부터가 베티 데이비스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데다. (당연히 뱃머리에는 베티 데이비스 여사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링커 네트워크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고립된 행성의 이름은 로빈슨 빼고 크르소이며, 이 행성의 대륙들은 수요일, 목요일, 토요일 같은 식으로 이름지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을 한번 보시죠.

 

 

그리고 상상해 보십시요.

이런 분위기의 핑크빛 키티호크급 항공모함을 말입니다.

이름은 로즈 셀라비.

뱃머리에는 마르셀 뒤샹을 잊지 말라는 듯이 커다란 빨간 장미를 꽂은 변기가 그려져 있는 항공모함이라니... 하하하

(참고로 위 사진의 제목도 로즈 셀라비. 마르셀 뒤샹 본인이 여장한 모습입니다)

 

전 우주적으로 스타트랙의 팬덤인 트래키들을 깔려있고, 세븐 오브 나인의 섹스인형에 목숨을 걸며 진저 로저스 얼굴을 한 인조인간과 끊임없이 2차대전을 재현하고 있는 토요일 대륙이 있는 행성.

이게 소설 <제저벨>의 세계입니다.

 

한국이름이 등장하면 갑자기 낯설어지던 SF장르 소설의 한국형를 능청스럽게 늘어 놓던 듀나가 이번에는 제대로 취향을 마음껏 들어내는 소설이죠. 장벽은 이 소설에 인용되거나, 패러디되거나 혹은 천연덕스럽게 의뭉떨고 있는 고전 영화들과 그 등장인물들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 없다면 제저벨을 타고 둘러보는 크루소의 풍경은 반쪽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작가가 소설을 중학생 수준에 맞춰서 쓰겠다고 작정하지 않는 한. 아니 그런 작정따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상. 독자는 존중하고 읽고, 아는 만큼 즐길 수 밖에요.

 

그렇습니다.

 

<제저벨>은 씨네필의 흉내라도 내 본 사람에게는 흐믓한 미소가 되겠지만 그게 뭥미?하시는 분들에게는 그저 그렇게 뭥미?인 한국 SF인 것입니다. 서울 남서부나 그 주변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참고

 

세븐 오브 나인은 스타트랙 보이저에 등장하는 외계인 캐릭터입니다. 보그인이라 인간의 감정에는 미숙합니다.

전통적으로 스포크나 데이터가 맡던 역활을 계승하는 캐릭터로 선배들과의 차별점은 섹시한 여성형 캐릭터라는 것!!

이게 포인트입니다.